문화/생활

이수광(1563~1628)은 우리가 흔히 역사책에서 <지봉유설>이라는 조선판 백과사전의 시조이자 실학의 선구자로 배웠던 바로 그 인물이다.
필자가 이수광에 주목한 지는 오래되었다. 예전에 우리에게 서양세계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추적해 올라가다 보니, 정조를 거치고 숙종을 거슬러 선조 때의 이수광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수광은 전주 이씨이므로 왕실 집안인데 여러 대를 내려가면서 왕족의 범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그가 벼슬길에 나선 때는 선조 18년(1585년)으로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절정에 달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당쟁에 휩쓸리지 않고 일관된 관리의 길을 걸었다.
광해군 때인 1611년 예조참판 등을 지낸 후 그는 왕세자의 관복을 청하는 사신이 되어 베이징을 다녀왔는데 이때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등 천주교 서적을 갖고 들어왔고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는 그때 만나서 들은 서양 사정과 천주교 교리 등을 짤막하게나마 담을 수 있었다.
그의 <지봉유설>을 읽다가 눈에 띄는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는 흔히 선조를 무능한 임금으로 치부하는데 이수광은 선조에 대한 그 같은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며 오히려 ‘목릉(선조 사후의 칭호)성세’라 부르면서 세종 다음으로 인재를 많이 길러 낸 임금이라고 찬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선조 때 이황, 이이, 이순신, 류성룡 등이 나왔다.
이후 <선조실록>을 읽고 <선조-조선의 난세를 넘다>라는 책을 쓸 때 선조의 긍정적인 면들을 새롭게 발굴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이수광의 그 한 마디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선조의 업적 중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사서삼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사업이다. 이것은 라틴어 성경을 영어나 독일어로 번역하여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것에 버금가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런데도 그 중요성을 몰랐기 때문에 선조가 이루어 낸 그 큰 업적은 임진왜란 때 도망쳤다는 이유로 무시되어 버린 것이다.
누구에게나 공이 있고 과가 있다. 선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 같은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해 준 이수광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강한 당색은 아니지만 동인·남인 계통이었던 그는 같은 왕실출신인 이원익과 대체적인 정치노선을 함께했다. 결국 광해군 5년(1613년) 북인의 이이첨이 큰 옥사를 일으켜 인목대비를 폐모하고 서궁에 유폐시키자 이수광은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했다.
그가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는 데는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1623년 송익필, 이이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서인들이 주동하여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왕위에 올렸다. 이로써 서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서인만으로는 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반정주도세력은 남인의 영수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모셨고, 그와 함께 평판이 좋았던 이수광도 도승지로 관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수광은 이후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냈고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당쟁의 시대에 실질을 중시했던 이수광은 그런 점에서 다시 한 번 재조명되어야 할 인물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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