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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책 읽어주는 남자 <장자 교양강의>




동서양의 사유체계가 얼마나 다른지 강조하는 책들을 자주 접한다. 뿌리내리고 살아온 삶의 근거가 다르고 집단적 삶에 주어진 과제가 달랐으니, 이를 해결하려는 철학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면 놀라운 현상을 발견하곤 한다. 일견 다른 듯하지만 속 깊은 곳을 바라보면 유사한 면도 의외로 많다. 이즈음 서점가에 동서철학의 차이보다 공통점을 도드라지게 강조하며 이야기를 풀어 가는 책들이 눈에 띄는 것도 학계가 이런 점을 주목하고 있기에 그렇지 않나 싶다.

<장자 교양강의>를 쓴 푸페이룽은 이력만 보더라도 동서철학의 공통점을 잘 소화해 대중에게 알려줄 만한 학자라는 믿음을 준다.

대만대학 철학과를 나왔고,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벨기에의 루뱅가톨릭대학과 네덜란드의 레이던 대학에서 동양고전을 강의한 경력이 있다. 과문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 정도로 동서양을 종횡무진하며 활동한 학자는 드문 듯하다.

<장자>의 첫 단락은 유명한 대붕 이야기다. 북쪽 바다에 ‘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그것이 변해 등이 몇 천리나 되는 ‘붕’이 되어 남쪽 바다로 떠난다는 이야기다. <장자> 읽기의 묘미가 이 대목에 있다는 이야기는 숱하게 들었을 터다. 이야기의 규모가 상당히 커서 그럴 터이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비범한 잠재력에 대한 장자의 믿음을 깔고 있다. 보잘것없는 것에서 어마어마한 것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이야기되면 어딘가 아쉽다.

그럼에도 많은 해설서는 여기서 멈춘다. 푸페이룽은 다르다. 니체를 들어 이 익숙한 이야기를 새로우면서도 풍요롭게 설명해 준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의 정신은 세번 변화한다. 먼저 낙타로 변하고 다음에는 사자로 변하며 마지막에는 어린아이로 변한다”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치다. 장자가 비약적인 변화를 말했다면, 니체는 단계별로 변한다고 본 차이만 있을 따름이다. 니체가 말한 낙타는 ‘수동적으로 타인의 명령을 듣고 일하는 존재’를 뜻한다.

사자는 “자기 자신에게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라고 묻는” 단계다. 수동적 태도에서 능동적 태도로 변화한 것이라 보면 될 것 같다. 어린아이는 “지금 현재 자신이 어떠하건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순수”를 뜻한다.

이 대목에서는 노자의 “어린아이로 돌아가라”라는 말과 맹자의 “대인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라는 말, 그리고 예수의 “어린아이를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해 희망과 가능성으로서 어린이의 상징을 풀어낸다.


<장자>에는 그 유명한 조삼모사 이야기가 나온다. 밤송이를 오전에는 세 알, 저녁에는 네 알 준다 했더니, 원숭이들이 화를 냈다. 그래서 오전에는 네 알, 저녁에는 세 알 준다 했더니 원숭이들이 마냥 좋아했다는 내용이다.

이 우화는 “전체를 보지 못하면 기쁨과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곤경에 빠진다는 얘기”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지은이는 한발 더 나아가 스피노자와 장자의 유사점을 찾아낸다. 스피노자는 영원의 빛 아래에서 만물을 바라보라고 말했다. “만약 영원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득실과 성패에 담담하게 대처할” 수 있을 터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며 사는 삶의 지혜에 대해 두 철학자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셈이다.

동서양을 넘나들며 <장자>를 이해 가능하게 풀어 준다는 점에서 <장자 교양강의>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오로지 비교철학 관점에서만 <장자>를 풀고 있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길. 붕이 왜 하필이면 남쪽으로 날아갔다고 했는가 하면, 고대 중국인들은 남쪽을 빛의 상징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근거로 해, 지혜를 추구하는 각오를 드러내기 위해서라 풀어 낸다. 동양의 고유성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장자>를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글ㆍ이권우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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