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475년 북위 풍태후가 보낸 사신이 평양에 와서 장수왕에게 공주를 달라고 강요하고 있을 때였다. 그해 백제 개로왕과 그의 가족이 한순간에 몰살당했다. 장수왕은 모두 보라는 듯이 그렇게 했다.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장수왕을 비방했을 뿐만 아니라 장수왕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북위의 풍태후를 자극했다. 무엇보다 개로왕은 북위에 보내는 국서에서 장수왕의 증조부인 고국원왕을 능욕했다.
“신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우의가 매우 돈독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선조인 고국원왕(釗)이 이웃 간의 우호를 가볍게 깨뜨리고 몸소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백제의 국경을 짓밟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선조인 근구수왕(須)께서
군사를 정돈하여 번개처럼 달려가서 기회를 타 돌풍처럼 공격하여, 화살과 돌이 오고 간 지 잠깐 만에 고국원왕의 머리를 베어 높이 달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감히 남쪽을 엿보지 못하였습니다.”(<위서>백제전)![]()
백제왕은 과거에(375년)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인 사실을 북위 조정에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장수왕에게 그것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되어버렸다. 장수왕은 고구려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주변 나라에 보여주고 싶었다. 475년 초겨울(9월) 장수왕이 고구려군 3만명을 동원하여 백제의 수도를 급습했다. 단번에 한성을 포위하였다. 백제의 개로왕은 성문을 열고 나아가 고구려 군대와 대결할 자신이 없었다.
고구려 군대는 4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2개의 군단은 한성의 배후 요새인 북성(北城)을 공격했다. 성벽을 사방에서 7일 밤낮으로 공격했다. 거대한 돌이 날아오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고 그 후 고구려군들이 성벽에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기어오르는 것이 반복되었다. 수비하던 백제군들은 이렇게 진이 빠져갔다. 북성이 먼저 함락됐다.
이제 고구려 군대는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이미 포위된 개로왕이 살고 있는 남성(南城)을 공격했다. 겨울바람이 북서쪽에서 불자 그것을 정면으로 맞는 성문 쪽에 장작을 가득 쌓았다.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화살을 쏘고 돌을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워버릴 작정이었다.
바람을 타고 불길이 활활 타오르자 시시각각 공포는 고조되었고, 저항의 의지가 꺾여서 항복하려는 자도 나타났다. 불에 탄 성문이 무너지고 고구려군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함락 직전에 이르자 개로왕은 수십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성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고구려 군 내부에는 그의 얼굴을 아는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이 있었다. 개로왕은 그들에게 발각됐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고구려로 망명한 백제장군이었다. 적에게 투항한 배신자의 가족이 무사할 리 없었다. 그들은 백제왕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개로왕은 그들에 의해 곧바로 체포됐고, 포박되어 얼굴에 침 세례를 받았다. 그것도 3번씩이나 말이다.![]()
고구려군이 성을 점령한 이후 대대적인 수색이 뒤따랐다. 개로왕의 부인과 그 자식들을 검거하기 위해서 얼굴을 아는 자들이 앞장을 섰다. 변장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한성에 있던 백제왕실의 구성원들은 이렇게 모두 체포되었다. 한성에서 나룻배에 실려 강을 건너 아차산으로 끌려갔다. 백성들은 가슴을 졸이며 결박당한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서울의 쉐라톤 워커힐 호텔 자리였다. 궁정에서 태어나 백제라는 국가를 이끌었던 사람이 예전 자신의 신하에게 포박되어 사형장으로 끌려왔다. 그 자신만만하던 사람이 형장의 사형수로 전락했다. 강 건너 자신이 살던 왕궁이 눈에 들어왔고, 한성 하늘 아래에는 개로왕 자신이 즉위할 때 환호하던 백성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으리라.
이제는 밑바닥이요 길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운명이 만들어놓은 대조적인 비극이 실현된 것이다. 함께 끌려온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최후의 시련만 참으면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몇 분만 지나면 그다음엔 불멸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귀한 신분의 왕과 그 가족이 모욕적인 치죄를 당하는 드문 풍경이 펼쳐졌다. 백제의 왕도가 훤히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말이다.
장수왕은 백제왕과 그 가족을 고이 죽이려 하지 않았다. 개로왕의 죄목이 나열되었고,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그 처형의식에 할애하였다. 형리가 포박된 그를 잡아채서 모루 위에 그의 머리를 고정시켰다. 연장은 둔탁한 소리를 냈고, 피가 떨어지는 머리가 땅바닥에 뒹굴었다.
백제왕과 그 가족의 처형의식이 끝나고 한성 사람들 가운데 젊고 쓸만한 사람은 모두 줄줄이 묶여 한강을 건넜다. 왕경에 살던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백제의 상류층 사람들이었다. 궁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귀족들, 중하급 관리들, 궁인들, 궁중 수공업장의 장인들과 강둑을 관리하던 토목기사들이 총망라되었다.![]()
백제 개로왕은 풍태후가 장수왕에게 사적 원한을 품었다고 생각하고 이를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의도대로 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재앙이 되고 말았다.
<일본서기> ‘웅략기’ 20년 조를 보면 ‘(475년) 백제는 망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바다 건너의 일본 왕이 이 정도 놀랐다면 소백산 줄기를 경계로 고구려와 접하고 있던 신라 국왕은 어떠했을까.
소식을 접하고 노이로제에 걸렸을 신라 자비왕(신라 제20대ㆍ458~479 재위)을 생각해 보자. 자비왕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온몸의 근육이 풀어지고 아래턱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장수왕이 개로왕과 그 가족을 잡아서 모두 학살했다고! 고구려 장수왕의 분노가 그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자비왕은 자신의 목을 확인해 보고 공포 서린 눈빛으로 자신의 가족을 바라보았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듬해인 476년 1월에 자비왕은 반월성을 버리고 명활산성으로 숨었다. 488년(소지왕 10년)까지 명활산성은 왕궁의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백제가 472년에 북위에 대해 펼친 외교는 백제 지배층의 오판일까?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은 436년 북연이 멸망한 후 가속화되었다. 백제는 끊임없이 국지전을 벌이면서 국력이 소모됐다. 북위에 대한 청병은 백제로서는 국운을 건 걸사운동(乞師運動: 군사를 청하는 글월을 걸사표라 함)이었다. <끝>
글ㆍ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 글 싣는 순서 |
① 다시 주목받는 백제 근초고왕
② 비운의 고구려 고국원왕
③ 광개토왕의 역사무대 등장
④ 광개토왕, 운명을 걸머진 자
⑤ 후연에 들어선 고구려 정권
⑥ 북위에 맞선 장수왕의 결단
⑦ 고구려 망명한 북연 황제, 풍홍
⑧ 장수왕의 중국 남북조 외교전략
⑨ 북위에 사신 보낸 백제 개로왕
⑩ 장수왕과 북위 풍태후
⑪ 백제 개로왕 일가의 몰살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