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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우리는 태종이나 황희는 알아도 박석명은 잘 모른다. 그러나 박석명이 없었다면 태종의 치적은 쉽지 않았을 것이고 황희는 이름없는 관리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박석명(朴錫命·1370~1406)은 3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으니 짧은 삶이었지만 조선초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순천 박씨인 박석명은 고려말 16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천재형 인물이다. 대체적으로 소년등과의 경우 벼슬살이가 평탄치 못했다. 자만의 덫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석명은 달랐다. 이미 20세 때 조선의 승지에 해당하는 우부대언과 병조판서를 지냈다. 아무리 고려말이 혼란기였다고 하지만 어지간한 능력이 아니고서는 20세 병조판서는 파격 중의 파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약간의 배경도 있었다. 박석명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의 동생 왕우의 사위였다. 결국 1392년 조선이 건국하자 박석명은 은거생활에 들어간다. 자칫 목숨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시기였기에 은인자중했던 것이다.

박석명의 운명을 바꿔 놓은 것은 1397년 9월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이다. 실록에 따르면 박석명은 이방원과 구교(舊交)가 있었다.

이방원도 우왕 9년에 문과에 급제했기 때문에 이방원이 박석명의 문과 급제 2년 선배였다. 그리고 이방원은 명민한 박석명을 눈여겨보아 두었던 것 같다.

정종 밑에서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로 있던 30세 박석명은 정종에서 태종으로 넘어가는 정권승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교서를 받아 태종에게 넘긴 이가 바로 박석명이다.

이후 박석명은 줄곧 승지로서 태종의 곁을 지켰다. 실록은 박석명의 업무능력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명달(明達)하고 강기(强記)하여 임금이 끝까지 의지하고 믿어 그 전후로도 그에 비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품계를 뛰어 의정부 지사로 임명되었다.” 특진을 시켰다는 말이다.

물론 실록은 그의 단점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종일 거나하게 마셨으나 일을 결단하는 것이 물이 흐르듯 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에 절조가 없어 여색에 빠지고 뜻이 높아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전횡하니 사람들이 매우 꺼리었다.”

박석명의 이 같은 면모는 세 아들의 이름에서도 확인된다. 첫째는 거비(去非), 즉 그릇된 것을 물리치라는 뜻이고, 둘째는 거완(去頑), 즉 무능이나 완고함을 물리치라는 뜻이고, 셋째는 거소(去疎), 즉 엉성함이나 덜렁거리는 것을 물리치라는 뜻이다.

주색 때문이었을까, 그는 아쉽게도 37세의 나이로 태종 6년(1406년) 세상을 떠난다. 그에 1년 앞서 태종은 박석명을 의정부 지사로 특진시키면서 후임을 천거하라고 했다. 이에 박석명은 주저없이 황희를 추천했다. 태종은 못미더워하면서도 박석명에 대한 믿음이 컸기에 황희를 박석명의 후임 지신사(훗날의 도승지)로 임명했다. 이때의 천거가 없었다면 세종 때의 황희 또한 없었을지도 모른다.

박석명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후손들 때문이다. 셋째 아들 박거소는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즉 박거소는 세종과 동서다. 그리고 박거소의 손자 박원종은 훗날 연산군의 폭정에 반대해 반정을 일으킨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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