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조선 당쟁사를 보면 대체로 서인들은 경직돼 있고 강경한 편이며 암묵적으로 임금보다 신하의 입장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후 조선은 서인들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도 왕권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린 것도 궁극적으로는 역시 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소론이 생겨난 때문이다. 이후 노론이 다시 벽파와 시파로 갈린 것도 시파는 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의 주전론에 맞서 주화론을 주창했던 최명길(崔鳴吉·1586~1647)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교육을 받아왔다. 아마도 식민지 경험 때문에 주화론이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 속으로 들어가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최명길의 주화론이 바로 그런 경우다.
최명길은 서인 중에서도 가장 유연했던 이항복의 제자다. 이항복은 동인(남인) 계통의 이덕형과 아름다운 우정을 나눌 정도로 사고가 유연했다. 이런 유연성은 제자 최명길에게도 이어졌다.
선조 말 문과에 급제한 최명길은 광해군6년 병조좌랑에서 파직됐다. 당시 정권은 동인에서 파생된 북인들이 좌우할 때였다. 이후 반정 양대장의 한 명인 이귀의 아들들과 가까웠던 최명길은 반정계획에 적극 가담해 9명의 1등공신 가운데 당당하게 그 이름을 올린다. 최명길은 목숨을 거는 결단력도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후 그의 벼슬살이는 탄탄대로였다. 병자호란이 났을 때 최명길은 이조판서였다. 이때 예조판서 김상헌과의 논쟁은 역사적으로도 유명하다. 최명길은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하다가 하루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며 명분론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래서 자신이 항복문서를 쓰자 강경파 김상헌은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때 최명길은 찢어진 문서조각을 풀로 이어붙이며 김상헌의 행위도 의미 있는 것임을 인정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이 때문에 실권을 장악한 김상헌류의 노론은 최명길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소인배로 매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오직 나라와 임금, 그리고 민생을 위해 온 몸을 바친 충정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647년 그가 죽었을 때 인조실록이 남긴 인물평을 보면 반대파 노론이 최명길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산성의 변란 때는 척화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그를 소인으로 지목하였다.”
같은 서인 출신임에도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심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욕에 가까운 ‘소인’으로 지목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 실록도 그의 장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정적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 대목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 그가 바로 최명길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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