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상인 신분인 객주이면서 섬을 제지 산업지로 성공시킨 강 객주(천호진 분)와 그 식솔이 황사영백서사건(1801년)과 관련되어 참혹한 죽임을 당한 후 7년 만에 그 일가족의 사형방법과 똑같은 끔찍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육지에서 섬으로 파견된 원규(차승원 분)의 이야기이다. 바다에 대한 공포로 태어나 한 번도 섬을 떠나본 적이 없는 인권(박용우 분)의 슬픈 사랑, 신분갈등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두호(지성 분), 그리고 섬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집단이 가지는 폭력성과 공포를 잘 버무려 한 편의 오싹한 미스터리 스릴러를 만들어냈다.
영화 속에서 사건의 배경이 된 것은 ‘황사영백서사건’이다. 1801년, 천주교 신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은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 장문의 글을 써서 이를 베이징 주교에게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청원서를 중국으로 가는 사신 틈에 몰래 끼워 보내려다 나라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그 관련자들도 참형을 당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는 섬을 발전시킨 공로자인 강 객주가 이 황사영의 경제적 후원자라고 무고를 받아 죽임을 당한 과거에서부터 이야기가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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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객주는 자신이 천주교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섬으로서는 누군가 희생자가 필요했다. 동화도가 제지 산업지로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인계 재상의 도움이 컸는데, 정조가 죽고 순조 초년 강성당파인 노론 벽파가 권력을 잡으면서 동화도에도 위기가 닥친다.
노론 벽파가 정조년간 왕의 총애를 받던 남인들을 천주교와 엮어 탄압하면서 남인계인 섬의 정신적 지주 김치성 대감 또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고, 그런 김치성을 대신하여 누군가가 희생되어야만 섬은 제지업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주민과 강 객주 간의 채무관계와 탐욕에 가까운 명예욕에 사로잡힌 토포사 이지상(최동준 분)의 참혹한 처벌 등이 강 객주 집안의 비극을 빚어내고 이는 결국 7년 후 기괴한 살인사건의 단초가 된다.
영화는 금난전권 폐지 후 발달한 상업환경 속에서 제지업을 일으켜 국제 무역을 통해 돈을 번 상인계급과 구시대 양반의 신분적인 갈등, 돈 앞에서 의리와 은혜를 배신하고 마는 집단의 이기심 등을 배경으로 깔면서 그 속에 소름끼치도록 절절한 사랑 또한 잘 배치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종이 만드는 제지소가 있는 동화도는 가상의 섬이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한지 생산지로는 완주(오늘날 전주), 경주, 영변, 순창, 평강 등지가 있지만,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한지가 생산되었고, 국가 기관인 조지서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에서도 종이를 만들도록 권장하였다고 한다.
18세기로 넘어오면서 서적문화가 발달하자 종이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 사장(私匠·나라에서 관리하는 장인이 아닌 일반 장인)이 종이를 만들어 부를 쌓는 일이 많았다. 국제 무역을 하거나 국내 유통망을 쥔 상인이 장인을 들여 일을 시키고 그 생산품을 교역하는 일도 많았는데 영화 속 동화도는 바로 이 상인인 강 객주가 주도하여 제지업을 일으킨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우리나라 종이는 한지(韓紙) 혹은 조선종이라고도 하며 닥나무(楮)나 삼지닥나무(三枝楮) 껍질을 원료로 한다. 닥나무를 삶아 껍질을 벗겨 말리고 다시 물에 불려 발로 밟아 하얀 내피(內皮) 부분만 가려내고, 이것에 양잿물을 섞어 3시간 이상 삶아 압축기로 물을 짜낸다. 여기에 닥풀뿌리를 으깨어 짜낸 끈적끈적한 물을 넣고 잘 혼합하여 고루 풀리게 한 다음, 발(簾)로 종이물(紙液)을 걸러서 뜬 것이 우리나라 한지이다.
영화에서는 동화도를 닥나무숲이 울창하여 종이 재료가 풍부한 곳으로 설정하였고 이 숲을 또한 미스터리의 공간으로도 이용하였다. 여기에 조선시대 제지소를 정교하게 복원하여 보는 재미와 함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공포의 공간으로도 만들었다.
한지는 신라시대부터 만들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에 이르면 그 우수성이 국제적으로 알려져 중국의 경우 국가공식문서에는 우리나라 한지만을 고집하였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나라에서 보내는 선물품목에도 한지가 반드시 들어갔고 중국의 상인들도 조선에서 꼭 수입하고자 하는 물품이 종이였다.
종이가 조선 후기 국제 교역의 주요물품이 되다 보니 종이를 만드는 제지업은 자연히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는 업종이었다. 영화 속 제지소 경영자였던 강 객주는 당연히 빠른 시일 내에 많은 부를 쌓을 수 있었고 이 부를 바탕으로 조선의 신분질서와는 다른 세상을 폐쇄된 섬이란 공간인 동화도에서 만들어보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성공은 구시대 양반질서를 고집하던 김치성 대감과 대립했고 마을사람들의 질투를 받았으며, 아래로는 신분제에 대한 생각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두호의 원한을 사게 된다.
섬 사람들 각자의 이기심 속에서 희생된 강 객주 일가의 원한은 7년 후 연쇄 살인사건이 터지면서 되살아난다. 섬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킨 죄의식에 시달리며 섬은 공포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 가운데 수사관 원규는 과거사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고 점점 범인을 향해 다가가게 된다.
영화 <혈의 누>는 19세기 초 사회의 변화 속에서 일어난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신분적 대립과 갈등을 매우 절절하고 지독한 사랑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어 영화를 보는 재미와 함께 역사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성적인 고민도 함께할 수 있도록 한다.
글·김정미 (시나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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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