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우리의 국민음식이라 할 수 있는 설렁탕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첫번째는 선농제(先農祭) 관련설이다. 선농제는 조선시대에 농사의 신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임금이 풍년을 기원하며 지낸 제사를 말하는데, 그때 제단에 바쳤던 소로 현장에서 국을 끓여 먹은 것이 그 기원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속설을 민속학자 김화진씨는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설명했다.
“조선왕조 때 매년 2월 상신일이면 왕이 지금의 제기동에 있던 선농단으로 거동한다. 생쌀과 생기장과 소, 돼지를 죽이기만 하여 통째로 놓고 제전에 올린 뒤에 상전에서 친경을 한다. 이 행사가 끝나면 미리 준비해 둔 큰 가마솥에다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짓고 소는 갈라서 국을 끓이고, 돼지는 삶아서 썰어 놓고 친경 때 소를 몰던 노농(老農)과 구경꾼 가운데 60세 이상의 노인을 불러서 먹였다.
이때 뚝배기를 빌려다가 밥을 담고 국도 퍼 놓는데 반찬이 되는 김치가 없어서 파를 씻어다
놓았고 간장도 없으므로 소금으로 간을 맞추게 하였다. 설렁탕은 선농단에서 끓인 국 같다고 하여 선농탕이 와전되어 설렁탕이 되었다”.
이 주장에는 반론도 많다. 조선시대에는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소를 사사로이 도살하는 것을 금지한 우금령(牛禁令)까지 있었는데 아무리 임금이라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소를 잡게 했겠느냐는 항변이다.![]()
<세종실록>에는 소의 밀도살을 단속하는 관청인 금살도감(禁殺都監)의 설치에 관한 기록과, 고기 먹은 자에게 가해지는 태형 50대는 가벼우니 더욱 엄단해 달라는 형조의 요청이 올라 있을 정도이니 그도 그럴 법하다.
두번째 견해는 몽골어 영향설이다. 몽골말로 고깃국을 ‘슐루’라 하는데 고려시대에 이것이 전래되어 ‘슐루탕’이 되었다가 설렁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 외에도 국을 오랫동안 ‘설렁설렁’ 끓인 데서 비롯된 명칭이라는 의견도 있고, 국물이 눈처럼 뽀얗다는 미의 설농탕(雪濃湯)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지금에 와서 그 진위를 가리기는 힘들다.
통상 설렁탕을, 옛 문헌에 등장하는 ‘고음(膏飮)’이나 그 후의 곰국, 곰탕 등과 뿌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1940년에 출간된 손정규(孫貞圭)의 <조선요리>는 설렁탕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그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그는 설렁탕의 특징을 “우육(牛肉)의 잡육(雜肉), 내장(內臟) 등 소의 모든 부분의 잔부(殘部)를 뼈가 붙어 있는 그대로 하루쯤 곤다”라고 했다.
뼈가 많이 들어가는 것을 곰국과의 차이점으로 꼽은 것인데 사실 그 구분이 그리 뚜렷한 것은 아니다. 그 전후에 곰국에도 뼈를 넣고 끓인다는 기록을 적지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음식에 해박했던 작고한 언론인 조풍연씨에 의하면 옛날 설렁탕집에서는 소 한 마리를 우피와 오물만 제하고 큰 가마솥에 넣어 새벽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끓였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끓인 진국은 “오늘날의 뜨물국 같은 설렁탕의 맛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며 “투박스럽고 거칠지만 소라는 짐승의 맛을 이보다 더 한꺼번에 느끼는 방법은 달리 없다”고 극찬한 바 있다.
6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을지로4가의 ‘문화옥’은 지금도 옛날 방식으로 설렁탕을 끓여 내는 집이다. 좋은 양지와 사골 등을 반나절 정도 물에 담가 핏물을 제거한 뒤 장시간 푹 고아 낸 국물은 잡내가 없으며 진하고 구수하다. 설렁탕에 빼놓을 수 없는 김치도 시원하고 감칠맛 나는 것이 입에 착 감긴다.
글·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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