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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산속의 좁은 길이 잠깐 사용할 때는 길을 이루다가, 또 잠깐 사용하지 않으면 띠풀이 가득 차게 된다고 하였는데, 어찌 오직 산속의 좁은 길만 그러하겠는가?’

조선 후기의 유학자 윤휴(尹?·1617~1680)가 자신의 문집 <독서기> 서문에 쓴 첫머리다. 한마디로 부단히 배우고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후학에 대한 권유이기도 하다.

윤휴는 거의 독학으로 학문을 연마해 송시열로부터 “나의 30년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구나”라는 자탄을 이끌어낼 만큼 깊은 수준에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윤휴는 독학자답게 당시 대부분의 학자가 경전 이상으로 숭배하던 주희의 풀이를 비판하면서 여러 경전들을 독자적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이 같은 독자노선은 주희의 풀이를 한 자도 바꿀 수 없다는 송시열 및 (서인) 노론의 성리학과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윤휴는 당파에서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친왕 노선인 남인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은연중에 신권(臣權)중심주의를 지향하던 서인 노론과는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이다.

송시열과 윤휴의 대결은 겉으로 보면 주자를 둘러싼 이념대립이지만 속으로는 권력투쟁이었다. 왕권강화를 꿈꾸던 현종은 윤휴를 중용했다. 현종 때 제기된 1, 2차 예송논쟁 때 왕실의 권위를 인정해 3년상을 주창했던 남인을 대표한 이론가가 바로 윤휴였고, 1년상이면 충분하다며 은근히 왕실을 폄하하려 했던 서인 노론을 대표한 이론가가 송시열이었다.

1차 예송논쟁 때는 윤휴가 참패하여 남인세력이 몰락했다. 그것은 이론의 몰락이라기보다는 효종 때 세력기반을 갖춰 놓은 서인을 현종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한 데 따른 정치적인 패배였다. 그러나 현종15년(1674년) 치밀한 준비 끝에 현종은 다시 예송문제를 제기했고 송시열 진영은 패퇴했다.

얼마 후 현종의 외아들 숙종이 즉위했고 남인정권이 들어서자 윤휴는 남인의 실력자로 떠오른다. 현실정치는 허적이 정승을 맡아 주도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가는 윤휴였던 것이다. 이때 현실타협적인 탁남과 원칙론적인 청남이 분화되는데 탁남의 지도자가 허적, 청남의 지도자가 윤휴였다.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서인은 탁남과 청남의 분리상황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정치세력이 약하던 청남을 먼저 제거한 후에 탁남을 일망타진하는 방식이었다. 1680년(숙종6년)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아들 복선군 역모사건이라는, 다소 미심쩍은 사건을 계기로 남인은 결국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게 되는데 이때 윤휴도 유배형을 받았다가 결국은 사약을 받게 된다.

그에게 덧씌워진 죄목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다. 간단히 말하면 주자의 ‘말씀’을 어지럽게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사상의 자유를 이야기할 때 우리 역사 속에서 사상의 자유를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로 이 사건이 언급된다. 그러나 실록을 통해 보면 오히려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정치적 패배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윤휴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사약을 받고서 했다는 말이다. “학자가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숙종에 대한 원망이었다. 학문이 자칫 화를 부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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