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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임진왜란이 터지는 바람에 덮이기는 했지만 임진왜란이 터지기 불과 2~3년 전 조선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기축옥사로 불리는 정여립의 난 때문이었다. 지금도 학계에서는 정여립을 불운한 혁명가로 보기도 하고 무리한 역모 추진으로 피바람을 자초한 반역자 정도로 폄하하기도 한다. 이런 논란은 별개로 하고 정여립의 생애를 간략히 훑어보면 자중자애라는 말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정여립(鄭汝立·1546~1589)은 명종이 죽고 사림이 추대하다시피 한 선조 초 새로운 기풍에 대한 기대가 큰 상황에서 문과에 급제했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으니 상당히 일찍 벼슬길에 오르게 된 셈이다.

관리생활 초반 정여립의 길은 탄탄대로였다. 38세인 1584년에는 핵심요직이랄 수 있는 홍문관 수찬(정5품)에 오른다. 게다가 정여립은 서인의 핵심인물인 이이와 성혼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 서인으로 분류되던 정여립은 이이를 비판하고 동인으로 전향한다. 전향의 이유는 분명치 않다. 아마도 이이가 세상을 떠나고 서인이 약화된 반면 이이의 라이벌이던 이발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줄을 바꿔 선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이 당시 정여립은 불혹(不惑)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논어>에서 공자는 제자가 혹(惑)에 관해 묻자 이렇게 답한 바 있다. “하루아침의 분노로 자기 자신을 망각해 (그 화가) 부모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혹이다.”

선조는 당파를 바꾼 정여립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요직에 앉히기를 거부했다. 이에 정여립은 욱하는 심정으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버렸다. 불혹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데다가 서인들에게 정여립은 ‘스승을 배반한 패륜아’였다. 서인 쪽에서는 어떻게든 정여립을 손보려 했다.

그런데 빌미를 제공한 것이 다름 아닌 정여립 자신이었다. 진안으로 내려간 정여립은 은둔의 삶을 택하지 않고 대동계를 조직해 세력을 확장하고 무장까지 시키는 무리수를 두었던 것이다.

대동계를 만든 이유가 조선왕조 붕괴의 ‘역모’였는지 불확실하다. 그러나 왕조국가에서 사병에 가까운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경솔하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결국 1589년 10월 사건이 발생했다. 황해도관찰사 한준이 정여립의 ‘역모’ 사실을 중앙에 고변한 것이다. 그로 인해 2년 가까이 계속된 살육은 역사 책에 있는 그대로다. 정여립도 사건발발 초기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정여립의 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학계의 몫이다. 다만 어느 쪽으로 평가가 이뤄지건 관계없이 정여립이라는 인물이 보여준 경솔함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경계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논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제자 유자의 말은 정여립의 생애를 떠올리면서 읽을 때 그 울림이 한층 커진다.

“그 사람됨이 효도하고 공경하면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드물다. (또)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나라의)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없다.”

즉 개인생활은 엉망인 사람이 갑자기 거창한 이야기를 해댈 때 우리는 일단 조심하여 그 사람의 말을 듣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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