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어버이날을 앞두고 기획된 출판물인 건 맞다. 그렇지만 묘한 매력이 있다. 프랑스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가진 여성 소설가 아니 에르노(72)가 1984년에 발표한 부녀(父女)간 관계를 다룬 자전적 소설이다. 게다가 번역본이 불과 1백30쪽이 안 되는 짧은 분량임에도 전체의 70퍼센트 가까이 내용은 어찌 보면 지리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마지막 30~40쪽에서
갑자기 콧등을 시큰하게 만든다. 그래서 문득 앞쪽을 다시 들춰보게 만든다. 부모 자식 관계라는 인류 보편의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불효자, 불효녀를 울린다. 그래서 출간 30년이 다 돼 어버이날을 앞두고 한국어로 다시 번역(1988년에도 번역된 바 있다)된 모양이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한 소설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빈농집안에서 태어나 고생 끝에 겨우 입에 풀칠하게 된 아버지 이야기로 진행된다. 우리로 치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겨우 글만 깨친 아버지는 1차대전 때 징병되면서 겨우 고향을 벗어나 파리 구경을 해본 촌사람. 오직 검약과 성실만이 그를 생존가능케 해준 미덕이다.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저자를 낳고 고향에서 겨우 작은 잡화점 겸 카페를 마련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쪼들린다.![]()
아버지가 늘 신경 쓰는 것은 한 가지.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다. 큰 딸이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벌지 않는 걸 방치하는 자신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 쓰는 아버지다. 아버지의 ‘일요일 옷’도 마찬가지. 주일미사에 입고 가는 특별한 옷이다. 그에게 딸이 하는 공부는 “좋은 신분을 얻고, 직공과 결혼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통”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딸은 공부를 잘했고, 장학금을 얻어 상급학교로 진학한다. 딸은 이 소설에서 끝까지 아버지를 ‘아버지’ 혹은 ‘아빠’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그’라고만 쓴다. 까칠한 딸이 끝까지 아버지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셈이다.
딸이 대학에 진학하자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한다. 딸은 친구를 집에 데려갈 때 필요 없는 변명을 한다. “우리 집은 말이야, 아주 소박해.” 하이라이트는 딸이 동급생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왔을 때이다. 딸이 ‘아무나’하고 결혼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버지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듯 사윗감을 맞는다.
그 이후의 기억은 프랑스라는 상황만 지워놓고 보면 우리 이야기라고 해도 믿길 정도다. 어머니는 딸에게 편지를 보낸다. “너희가 원하면 집에 와서 쉬어도 괜찮다.” 대놓고 오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랜만에 들른 딸로부터 애프터셰이브 로션 한 병을 선물로 받은 아버지는 “내가 이걸 어디다 쓰지? 이거 나한테서 술집여자 같은 냄새가 나겠는걸!”하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손자를 앞에 앉히고는 둘러앉아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연달아 질문을 하다가, 불쌍한 꼬마를 너무 피곤하게 만든다고 자기들끼리 질책을 하고, 그러면서도 기뻐한다.
결국, 아버지는 위암으로 돌아가신다. 그것도 병원 한번 제대로 가지 않고, 약 한번 쓰지 않고 그저 “더위 먹었나? 음식을 토하네” 하다가 가셨다. 딸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 독백한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1백27쪽)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문득 ‘부모님께 전화 드려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글·김한수 (조선일보 문화부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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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