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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요즘 TV에서 <뿌리깊은 나무>라는 사극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태종과 세종의 갈등으로 시작해 <훈민정음> 창제에 이르는 과정을 다룬다고 하니 그 시기에 특히 관심을 가져온 입장에서 왠지 더 눈길이 간다.

그 시기를 들여다보면 임금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누가 뭐래도 정인지(鄭麟趾·1396~1478)를 첫손가락에 꼽을 수밖에 없다. 그는 사람 잘 보기로 정평이 나 있었던 태종이 1414년 문과에서 직접 장원으로 꼽은 인재다. 열아홉에 장원급제한 것이다. 훗날 세종이 왕위에 올라 태종이 상왕으로 ‘임금훈련’을 시키고 있을 때 병조좌랑 정인지가 두 임금 앞에 불려왔다. 이때 태종은 먼저 정인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그대 이름을 들은 지 오래나, 얼굴은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들게 한 다음 한동안 얼굴을 뜯어본 다음 세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인재를 얻는 것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것이 없는데 정인지는 크게 등용할 만하다.”




이후 세종은 실제로 정인지를 중용하기 시작한다. 특히 정인지는 관리로서의 이재(吏才)보다는 학재(學才)가 출중했기 때문에 세종은 정인지를 주로 이 분야에 배치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정인지는 <용비어천가>를 지었고 <고려사>, <역대병요>, <자치통감훈의> 등 세종시대의 중대 편찬사업을 주도했다. <훈민정음>의 서문을 풀이한 것도 정인지다.

형조·예조·이조·공조 판서 등을 두루 거친 정인지는 문종 때 요직 중의 요직인 병조판서에 임명됐다. 그러나 역사의 파고에 정인지도 휩쓸리게 된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고 이때 정인지는 수양대군(훗날의 세조) 편에 선다. 곧장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세조가 즉위하자 정인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 영의정에 오른다.

그의 활동 하나하나가 다 역사요, 이야기다. 뛰어난 재능과 출세, 그리고 세상과의 타협이 있었다. 세조 쪽에 줄을 섬으로써 사실 정인지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그다지 후하지 않다. 학재가 뛰어난 때문이었는지 정인지는 세조에게도 할 말은 다했다.

세조3년에는 불교책의 간행에 결사 반대하다가 충청도로 유배를 가기도 했고 술자리에서 세조에게 너(爾)라고 했다가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젊어서 <역대병요>를 함께 편찬했고 <훈민정음> 창제 때도 비밀작업을 함께하면서 개인적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었겠지만 임금은 임금이고 신하는 신하였던 것이다. 어쩌면 정인지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세조를 임금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했는지도 모른다.

실록이 전하는 그에 대한 평가다. “정인지는 성품이 검소하여 자신의 생활도 매우 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재산 늘리기를 좋아하여 여러 만석이 되었고 심지어 이웃 사람의 것까지 많이 점유하였으므로 당시 여론이 이를 비판적으로 여겼다.” 역사와 사람에게는 빛도 있고 그림자도 있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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