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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금의환향 U-17 여자월드컵 한국대표팀




 

어릴 때부터 꼬마는 힘이 장사였다. 키는 작았지만 또래 여자아이들보다 발은 10~15밀리미터 더 컸다. 달리기도 잘했다. 운동회 때 계주 마지막 주자는 사내아이들이 아닌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꼬마는 우연히 유소년 축구클럽에 갔다. 축구를 좋아하는 오빠를 따라갔는데 주목은 그가 받았다. 키가 10센티미터 이상 큰 사내아이들에 끼여 공을 차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를 지켜본 클럽 감독은 이런 생각을 했다. ‘저런 축구 센스를 본 적이 없다. 저 아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10년 뒤 한국축구 역사를 바꿀 텐데.’ 이후 꼬마의 머릿속엔 온통 축구뿐이었다.

축구부에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고부터는 날개가 달렸다. 시작하고 얼마 뒤 고학년들을 제치고 주전 자리를 꿰찼고, 대회에 나갔다 하면 득점왕을 휩쓸었다. 중학생 땐 전국구 스타 반열에 올랐다. 경남 함안군 함성중학교 재학 시절 14세 나이로 19세 이하 대표팀에 뽑혔다.
 






 

당시 19세 이하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준비하던 이영기 감독이 “함성중에 괴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보러 갔다가 한눈에 반해 발탁했다. 이 감독은 “온몸이 무기다. 다른 나라 선수가 아닌 게 정말 다행”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대표팀에서 유일한 중학생에게 이런 호평을 내린다는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

소녀의 재능을 하늘이 질투했을까. 밝은 빛만 비칠 것 같던 그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2008년 4월 경기 도중 오른쪽 무릎 전방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축구를 더 이상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식욕이 없어지고 말수도 줄었다.

낙담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주일 뒤 훌훌 털고 일어났다. 그가 중1 때부터 꾸준히 써온 일기장엔 이맘때 ‘파이팅’이란 문구가 머리말로 자주 등장했다. 몸이 고단하고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스스로 다잡기 위해 그렇게 썼다. 당시 그의 재활을 도운 의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성인 남자도 힘든 빡빡한 재활 과정을 묵묵히 견뎠죠.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끈기가 대단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그 ‘뭔가’가 ‘축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예상보다 이른 지난해 1월 소녀는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감을 잃은 게 문제였다. 그라운드가 낯설게 느껴졌다. 소녀가 다니는 함안 대산고 김은정 감독은 “공을 잡을 때마다 눈빛이 흔들렸다. 어떻게 자신감을 심어줄지 막막했던 상황”이라고 당시를 기억했다.








 

소녀가 스스로 내린 정답은 훈련이었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 누구에게나 삶을 깨우는 질문은 찾아온다. 그 질문을 수신하느냐, 거부하느냐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소녀는 ‘부상을 이겨낼 수 있느냐’는 질문에 ‘훈련’이라는 키워드로 수신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땀을 흘렸다. 덕분에 킬러 감각을 되찾았고 월드컵을 앞두고 괴물로 돌아왔다. ‘흘린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가슴에 품고 사는 노력형 천재. 여민지(17) 이야기다.

이번 대회를 통해 월드 스타로 자리매김한 여민지의 이름이 나올 때면 항상 등장하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지난 8월 U-20 여자월드컵에서 ‘실버볼(득점 2위)’을 차지하며 한국을 3위로 이끈 지소연(19·한양여대)이다.

타고난 축구 지능에 컴퓨터 패스, 정교한 슈팅이 장점인 지소연과 힘, 스피드, 골 감각의 3박자를 갖춘 여민지가 ‘듀오’로 활약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팬들은 흐뭇하다.

최인철 성인여자 축구대표팀 감독은 최근 둘을 성인 대표팀에 합류시켜 팬들의 기대치를 높였다. 9월 29일 오후 17세 이하 대표팀 환영연 및 해단식에 깜짝 등장한 지소연은 “민지와 함께 한국 여자축구 발전을 위해 뛰고 싶다”고 밝혔다. 여민지도 이 자리에서 “소연이 언니와 뛸 수 있어 흥분된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물론 성인 무대에서 두 선수가 당장 정상급 활약을 펼치긴 쉽지 않다. 이미연 여자축구 부산 상무 감독은 “여자선수들은 한 살 차이만 나도 기량 차이가 크다. 경기 운영능력이 확실히 다르다”고 했다.

한국은 2011년 성인 여자축구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5년 월드컵은 상황이 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여’ 듀오가 전성기로 접어드는 이 시기엔 한국이 세계무대를 호령할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글·신진우(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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