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조선시대 정조 임금을 조명할 때 늘 그 반대쪽에는 심환지라는 인물이 그려진다. 그러나 선악의 틀은 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의 심환지가 역사 속의 심환지와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우리 학계에서는 정조를 다소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심환지를 보는 시각이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그러나 실록을 통해 본 심환지는 임금에게까지 맞섰던 노회한 정치가이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노론 벽파의 최고 지도자였다. 적어도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노선을 바꾸는 짓은 하지 않았던 강고한 인물이다.
심환지(沈煥之·1730~1802)는 청송 심씨로 어려서부터 노론의 당색을 갖고 있었고 정치생활 내내 정조와 대립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마흔두 살 때(영조47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정조3년(1779) 문신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할 만큼 학문에 일가견이 있었다.
이후 암행어사, 대사간, 대사헌 등을 거쳐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내는 등 비교적 빠르게 승진했다. 그러나 그가 주목을 받은 것은 관리로서의 능력보다 당파 영수로서의 지도력이었다.
정조는 노론 중에서는 자신이 길러낸 시파들을 중시했고 틈나는 대로 체제공 같은 남인들을 중용했다. 노론 벽파는 사실상 정조의 정적이었고 그 우두머리가 바로 심환지였다. 따라서 정조 시대를 제대로 조명하려면 정조만 부각하고 심환지를 매도하는 기존의 방식보다는 정조와 심환지의 피말리는 권력투쟁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정조를 좋아하느냐 심환지를 좋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실상을 파악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2009년 2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는 그간 책이나 드라마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정조와 심환지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정조는 정국의 주요현안이 생길 때마다 심환지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냈고 때로는 간청하고 때로는 시파에 대한 욕설까지 마다않으면서 심환지의 협조를 얻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두 사람의 싸움에서 승자는 심환지였다. 정조가 죽자 어린 순조를 돌보는 원상(院相)에 임명되고 영의정으로서 정권을 장악한 심환지는 정조가 그처럼 공을 들였던 장용영이라는 특수부대를 없애버렸다. 정조의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는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대비의 지원 속에서 전국의 공노비를 혁파했다. 노비제 폐지의 일등공신이 바로 심환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역사에서 비난을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실은
1801년 천주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신유사옥의 주동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화 물결이 시작되고 근대화가 새로운 조류가 되면서 심환지는 변화의 물결을 거부한 수구세력의 표본처럼 낙인 찍혔다.
게다가 순조의 장인인 안동 김씨의 김조순이 이끄는 시파가 벽파를 내몰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1806년 심환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관작(官職)이 추탈되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기간 심환지는 악인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철학은 풍양조씨와 흥선대원군으로 이어진다. 1864년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즉위한 직후 심환지의 관작이 복작된 것도 그 때문이다.
글·이한우 (조선일보 기획취재부장)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