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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 어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비단 채색·123.2×31.7cm)’. 이 그림은 왼편 하단부터 현실 세계가 전개되다가 오른쪽으로 환상적인 도원 세계가 펼쳐진다. 현실은 부드러운 토산(土山)으로, 도원은 기이한 형태의 암산(巖山)으로 그려졌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점점 높고 웅장하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사람과 동물들은 보이지 않아 중국의 도원도(桃源圖)와는 차이가 있다.

몽유도원도가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반출되었는지는 고증이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비화는 이 그림이 일본 학계에 알려진 뒤 현재의 덴리대학(天理大學)으로 들어가기까지이다.

몽유도원도가 덴리대학에 들어간 것은 대략 1950년대 초로 추정된다. 그림을 산 대학측이 대금을 완불한 것이 1955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일이 있다. 사실 이 그림은 1950년에 장석구(張錫九)가 한국으로 가지고 와 판로를 찾은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의 장석구는 점원으로 있으면서 상술을 배워 곡물 거래와 부동산 등으로 거액의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골동품계에 발을 들여놓아 해방 후 일본인들이 돌아가며 헐값으로 내놓은 국보급 문화재를 산더미처럼 수집하여 호사를 누린 사람이다. 사업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1949년 몽유도원도를 들고 나타났다. 하지만 엄청난 거금의 몽유도원도는 끝끝내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나갔고, 그 후 덴리대학으로 들어간 것이다. 큰돈을 번 장석구는 더 큰돈을 벌고 싶어 한국의 문화재로 지정된 명품까지도 일본에 반출해서 이익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에 남겨두었던 모든 고미술품을 이삿짐처럼 꾸민 다음 아무런 검열도 받지 않고 한꺼번에 일본으로 싣고 갔다. 그의 문화재 밀수와 불법 반출 사실은 곧 당국이 알게 됐고, 이승만 대통령은 당장 장석구를 체포하여 압송하라는 지명체포령까지 내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 말을 비웃기나 하듯 일본서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죽었고,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몽유도원도가 고국 땅을 밟은 것은 1996년 겨울이다. 우리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재조명하기 위해 호암미술관이 개최한 ‘위대한 문화유산을 찾아서-조선전기국보전’의 출품을 위해서이다. 몽유도원도의 출품을 의뢰받자, 덴리대학은 난색을 표명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의 수준 높은 문화, 예술적 역량을 대표하는 이 그림을 일본 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국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질 경우 자칫 민족적 반감으로까지 비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술관 관계자의 끈질긴 노력과 한국 정부의 안전 보장을 약속받은 다음에 출품되었다.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 문화민족으로서의 높은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으며 동시에 불행했던 근대사를 돌이켜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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