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SET_IMAGE]2,original,center[/SET_IMAGE]
[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1945년 광복 다음해의 설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끝내 돌아오지 못한 남정네들은 조상의 신위에 절을 올리지 못했다. 그들은 일본의 어느 탄광에서, 만주의 공장과 농장에서, 일제가 벌인 태평양전쟁의 한 전쟁터에서 뼈를 묻어야 했다. 가족들이 온전히 살아남은 행복한 가정의 설은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새로운 시작을 각오하는 복된 시공간이었다. 그러나 식구가 돌아오지 않은 가정은 한과 북받치는 설움을 차례상 위에 토할 수밖에 없었다.
광복과 6·25를 거치는 동안에도 설은 어디까지나 설이었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새로 지은 옷을 입는데, 이 옷을 ‘설빔’ 또는 ‘설비음’이라고 했다. 설빔은 남녀노소나 빈부귀천 없이 생활의 정도에 따라 준비하는데, 각 가정에서는 설빔을 마련하기 위해 가을부터 미리 옷감을 준비해두었다가 정성껏 옷을 장만했다. 특히 어린이들은 색동저고리를 입는데, 이것을 ‘까치저고리’라고 했다.
설날 음식으로는 떡으로 만들 수 있는 떡국과 떡만두국·갈비찜·사태찜·생선전·편육·족편·녹두빈대떡이 나왔다. 삼색 나물과 잡채가 식탁을 화사하게 장식했고 후식으로는 약과·다식·수정과·식혜·강정과 산자가 개운하게 마무리했다.
모처럼 기름진 음식으로 포식한 아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배앓이를 했고 어른들은 오랜만에 모인 가족, 친지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B]“뭐니 뭐니 해도 가족, 고향이 최고”[/B]
경제개발 시대의 설은 터져나갈 것같이 빽빽하고 기나긴 귀성열차로 상징되었다. 부모님께 드릴 양과자 상자와 동생들에게 나눠줄 ‘나일론 양말’ 보퉁이를 끌어안고 사람들은 고향을 찾았다. 하루 12시간 공장 노동에 시달리던 농촌의 아들딸들은 부모님의 묘소에 소주를 따르며 눈물을 훔쳤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포니 자동차를 타고 온 자랑스러운 아들 며느리가 농촌의 부모들을 감격시켰다.
전 국토가 설만 되면 귀성 행렬로 몸살을 앓았다. 코소보 전쟁의 피난 행렬보다 더 길고도 거대한 민족 대이동이 해마다 벌어졌다.
급기야 농촌에서 서울로 차례를 지내러 오는 역이동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설날 선물의 풍속 역시 급격히 변화했다.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0년대 한국인에게 가장 주고 싶은 설 선물은 ‘현금’이고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백화점 상품권으로 나타났다. 광복 직후부터 1950년대까지는 달걀 꾸러미·고추·찹쌀·토종닭 등 1차 식품이 설 선물의 주류를 이뤘다. 1960년대의 선물 목록은 설탕·조미료·50개들이 라면박스 등이었다. 특히 30kg들이 ‘그래뉴설탕’은 부유층간에 오가는 대표적인 선물이었다.
1970년대는 라디오·스타킹·양산 등 경공업제품이 설 선물로 인기를 끌었다. 일부 부유층 가정에서는 흑백 TV도 오갔고, 커피 문화가 확산하면서 커피가 고급선물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1970년대 당시 수백 종에 불과하던 명절 선물이 지금은 3천 종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식품류 선물 세트도 1천여 종에 이른다.
세시풍속의 변화는 급속하고 광범위한 것이다. 설날 차례를 휴양지의 콘도에서 지내는 이른바 ‘콘도제사’가 유행하고 설 연휴를 이용한 국내외 관광지의 호텔이 예약 만원 사태를 빚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RIGHT]한기홍 객원기자[/RIGHT]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