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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1946년 미군정 시절 서울. 골동상 엄창익의 가게에 미군 헌병이 들어오더니 손짓 발짓으로 ‘골동품이 산처럼 가득히 쌓여 있으니 자기와 함께 가보자’고 했다. 엄창익이 호기심에 따라간 곳은 일본인 사이토쿠 타로(齋藤久太郞)가 경영하던 요릿집, 금천대회관(金千代會館)이었다. 이곳은 해방 후 사이토쿠가 일본으로 떠나버리자 미군들이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지하실로 들어간 엄창익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쫓겨가는 일본인의 짐에서 미군이 압수한 고미술품들이 지하실 가득히 쌓여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잘 포장된 고리짝 하나를 풀어헤치더니 다짜고짜 설명을 요구했다.

미군이 가리키는 대로 엄창익은 내용물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고, 그 대가로 족자를 받았다. 조심스럽게 족자를 펼치자 안에는 호랑이 한 마리가 의기 등등한 모습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에는 벽창호나 다름없던 엄창익은 그림 윗부분에 해서로 써놓은 발문조차 읽어볼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서화를 잘 알던 최병한으로부터 깜짝 놀랄 이야기를 들었다. 그 족자가 영조 때 대가인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심사정은 조선 후기의 남종화(南宗畵)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선비 화가였다. 본관이 청송(靑松)이고 호는 현재(玄齋)·묵선(墨禪)을 썼다. 포도를 잘 그린 정주(廷胄)의 아들로 사대부 출신이었으나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그림에만 매달렸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일제 때 남산에 있던 민속박물관의 관장을 지냈던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白敎)가 엄창익의 가게에 들렀다. 그는 아우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와 더불어 이 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던 일본인이다. 아사카와 노리다카는 시간만 나면 등산 모자에 운동화를 신고서 전국에 있는 도요지를 찾아 다녔다. 인부를 사 흙을 파내고 도자기 파편을 수집하는 게 일이었다. 그는 파편들을 정리해 우리 도자사 연구에 공헌하고, 해방 후에 국립박물관의 고문을 지내면서 수천 점의 파편 자료를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엄창익에게 가급적이면 이런 훌륭한 그림은 박물관에 팔아서 여러 사람이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엄창익은 덕수궁박물관을 찾아가 1만5000원을 받고 이 천하의 명품을 팔았다. 당시 시가로는 3만원을 훨씬 상회했으나, 아사카와의 말에 감동을 받아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 후 이 그림은 1970년대 초 ‘한국명화 근대 오백년전’에 출품되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국립중앙박물관 도록의 표지로까지 장식됐다.

그런데 오랫동안 18세기에 심사정이 그린 것으로 여겨져 온 이 그림의 연대에 문제가 생겼다. 갑오년이라 함은 서기 1714년 혹은 1774년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심사정의 나이가 10세 미만이거나 아니면 사후가 된다. 만약 이 그림이 심사정의 그림이라면 낙관과 발문은 후대에 찍고 쓴 것이라 추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심사정의 그림으로 추정하거나 또는 필자 미상의 작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때문에 최근에는 18세기경의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간주하는 경향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호랑이의 동작 포착과 묘사력, 그리고 화면 구성에서 흠잡을 데 없는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어 기량 있는 화가의 작품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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