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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그 바다 참 너르다.”

금오도 함구미 선착장에서 시작되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30여분 걸었을까. 순간 넝쿨 숲이 사라지고 바다를 향해 시야가 툭 트인 언덕이 나타났고 그곳에 서 허리에 손을 짚은 한 여행객이 말했다.

훅, 하고 불어 오는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훑고 지난다.

섬 전체에 가득 피어난 찔레꽃 향이 묻어 있는 달콤한 바람이다. 그의 시선을 좇아 바다로 고개를 돌리니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그의 말은 참말이었다. 도무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쪽빛의 크고 너른 바다는 보는 이의 가슴마저도 파랗게 물들이는 것 같았다.

“요 앞에 보이는 것이 ‘개도’라는 섬이고 그 옆으로 차례로 월호도, 대두라도야. 그 옆 쪼그만 섬이 소횡간도지. 맞다, 저기 왼쪽으로 멀리 보이는 섬이 고흥반도 외나로도야. 우주선 발사 때 여기서도 훤히 보였지.”




지나가던 마을 사람의 말이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몇 개의 섬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지금 서 있는 이곳을 용두바위라고 했고, 가을이면 억새가 이룬 숲 풍경이 너무나 멋져 <혈의 누>와 같은 영화에 담겨졌다고도 했다. 비렁길. 대한민국에 불어온 도보여행의 열풍이 남도의 끝자락 이 작은 섬에도 닿았나 보다. 남도 사투리로 ‘벼랑’을 일컫는 ‘비렁’을 따라 길이 났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여느 산책길과 달리 대부분의 길을 바다를 곁에 두고 걸으니 원 없이 푸른 바다를 볼 수 있어서 좋다.

여수 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한 화신해운 소속의 배가 1시간30분을 달려 도착한 함구미선착장이 비렁길의 시작이다. 이 섬에서 가장 큰 선착장이라고는 하나 손바닥만한 대합실 하나 공중화장실 하나가 전부다. 머리 흰 노부부의 살림집이 연결된, 컵라면과 과자 따위를 파는 조그만 가겟집이 하나 대합실 맞은편에 있긴 하다. 양갱 하나, 초콜릿 두어 개와 생수 한 병을 사 들고는 비렁길을 걷기 시작했다. 반듯하게 쌓아 올린 이 마을 돌담길이 눈에 익다 싶었더니 전도연이 나온 영화 <인어공주>에도 여러 번 등장했다고 한다. 긴 담을 따라 뻗어 나간 담쟁이덩굴이 참으로 어여쁘다. 돌담이 끝나면 비탈길은 온통 초록이다.



이 섬에 지천으로 자란다는 방풍나물 밭에서는 장에 내다팔 나물을 캐는 촌부의 손길이 분주하다. 실제로는 방풍을 처음 보는지라 허리를 굽혀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밭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다가와 맛이나 보라며 방금 뜯은 나물을 건넨다. 그가 입에 넣어 준 방풍잎은 쌉싸래하면서도 독특한 향이 났다.

“슬쩍 데쳐서 초고추장 찍어 먹어도 좋고 된장, 마늘, 참기름 넣고 무쳐 먹어도 좋지라. 울 동네선 된장국도 끓여 먹고 말려서도 먹응게. 아, 이것마냥 좋은 게 또 있습디까.”

그는 “4, 5월 방풍이 제일 맛나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중풍을 예방해 준다고 알려져 있어 이름도 ‘방풍’ 이라 붙인 방풍나물은 여러 가지로 몸에 이롭다고도 한다.

비렁길은 바람과 햇살과 바다와 동무하며 걷는 길이다. 금오도 주민들이 다니던 길을 넓혀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 동백나무 숲이 펼쳐지고 그 다음엔 대나무 숲이 나타나더니 또 바다가 툭 튀어나온다. 바다 위에는 고래를 닮은 크고 작은 섬들이 동실동실 떠 있다. 지루할 틈 없이 걷는 맛이 쏠쏠하다. 게다가 쉴 새 없이 지져대는 새들의 노래도 유쾌하기 짝이 없다.

어떤 녀석은 ‘도도도도 삐꼭’ 하며 울고 다른 놈은 ‘삐쪽 삐쪽’ 울고 또 ‘휘, 휘’ 하며 긴 휘파람 소리를 내며 저마다 재잘재잘댄다. 저 할 이야기만 늘어놓는 듯싶어 우습기도 하다.




울어대는 것은 새들뿐만이 아니다. 바람에 서걱대는 대숲의 소리는 먼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만큼이나 여행자의 마음에 긴 파장을 남긴다. 불어오는 바람과 따뜻한 볕과 청결한 흙냄새, 나무냄새, 바다냄새가 함께하는 길 위에서 발걸음은 더없이 가볍다.

함구미 선착장에서 시작해 남쪽 해안을 따라 금오도의 가장 끝마을인 장지까지 이어지는 18.5킬로미터의 비렁길은 모두 다섯 개코스로 구성돼 있다. 하이라이트는 함구미에서 두포에 이르는 5킬로미터 구간의 1코스. 원시의 풍경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용두바위 부근과 ‘미역널방’의 경치는 금오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마을 주민들이 바다에서 채취한 미역을 지게에 지고 와 이곳에 늘어놓고 말렸다고 해 미역널방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절벽은 표고가 90미터나 되는 아찔한 높이를 자랑한다.



바다를 향해 수직으로 뻗어 내려간 날카로운 절벽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참으로 시원해 쾌감마저 전해 준다. 미역널방 부근으로 작은 공원을 만들어 놓아 쉬어갈 수 있게 했는데 절벽 끝에 설치해 놓은 망원경을 통해 까마득한 아래쪽을 살펴보니 갯바위에 우뚝 서 대물을 노리는 강태공의 모습도 보인다. 두포(초포)에서 시작되는 2코스(3.5킬로미터)의 하이라이트 구간인 굴등 전망대에서 촛대바위를 거쳐 직포에 도착한 뒤 잠시의 휴식 후 다시 학동까지의 3코스(3.5킬로미터)를 걷는다.

3코스는 매봉산 전망대로 이어지는 붉은 동백나무 터널과 구불구불 벼랑길을 에둘러 가는 나무 데크길이 정겹게 느껴진다. 사다리통 전망대와 온금동, 심포항에 이르는 4코스(3.2킬로미터)의 포인트는 돌길 옆으로 늘어선 부처손의 이국적인 풍경이다.


4코스의 종착점인 심포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2시30분. 오전 8시부터 시작된 비렁길 종주코스 중 4개의 코스를 마쳤다. 심포에서 막개를 지나 장지까지의 마지막 3.3킬로미터를 앞두고는 숭어떼 참방참방 튀어 오르는 포구 앞에 앉아 다시 숨을 고른다.



이 봄이 가기 전 금오도를 다시 한 번 찾게 된다면 다음번엔 이섬의 동쪽 해안을 따라 연륙교를 지나 또 다른 섬 안도까지 이어지는 길로 자전거 하이킹에 도전해 봐야겠다. 25.7킬로미터, 세 시간이면 족하단다. 안도는 2009년 금오도와 다리가 놓인 후 형제가 된 작은 섬이다.

4백80여 명의 주민이 사는 이 섬은 모양이 기러기처럼 생겼다고 해 기러기 ‘안(雁)’ 자를 썼는데 1910년 안도(安島)로 개칭했다고 한다. 안도의 동쪽방향 해변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나오는 안도해변은 금빛 모래와 손톱만한 조가비들로 뒤덮인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 안도해변 근처에서 상산(해발 2백7미터)의 동남쪽 둘레길을 따라 조성돼 있는 상산트레킹 코스도 멋지다고 소문났다.

그리고 그때 다시 이 섬에 오게 되면 하룻밤을 보내며 꼭, 끝내주게 멋지다는 일몰도 봐야겠다. “여수가 품은 섬과 그 바다 위로 내려앉는 홍시처럼 붉은 노을 때문에 이 섬에 들어앉게 됐다”는 한 주민의 말이 진짜인지 확인도 해야 하니 말이다.

글·고선영 (여행작가) / 사진·김형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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