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봄의 경주는 자전거 천국이다. 벚꽃 필 무렵이면 하루에 3만여 여행자가 자전거를 타고 이 도시를 달린다는 통계가 있다. 올해 경주의 벚꽃여행은 4월 중순께 절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경주에서 벚꽃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은 황성공원 가는 길이다. 곧이어 대릉원에서 첨성대 가는 길과 김유신장군묘 가는 길, 보문단지 순으로 피고 나면 경주는 온통 꽃비 내리는 도시로 변신한다.
벚꽃 핀 경주의 자전거 여행은 외국인 여행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경주를 여행하다 보면 무리를 이뤄 자전거로 달리는 외국인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살랑살랑 봄바람 맞으며 곳곳에 보석처럼 박힌 신라 천년의 문화유적을 따라 두 바퀴로 달리는 일은 참으로 근사하다.
경주 시내 곳곳에 자전거 대여점이 굉장히 많은데, 경주역과 터미널, 대릉원 앞, 보문단지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자전거 숍이 성업 중이다. 한나절 대여에 보통 5천원에서 7천원 선이고 시간당 3천원 정도 한다. 1박2일 대여에는 1만원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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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젊은 여행자들이 많이 찾아 세련되고 예쁜 모양의 자전거가 대부분이다. 경주 자체가 언덕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인 데다 대부분의 유적지가 한데 몰려 있어 체력 소모가 크지 않다. 경주시 역시 자전거 여행자를 위한 준비를 많이 해 두었다. 지금까지 주요 역사 유적지를 연결해 조성한 경주 자전거 도로는 1백8킬로미터다.
난이도에 따라 6개의 투어코스가 있다. 초보 라이더라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속으로’의 15킬로미터에 이르는 코스를 선택하면 적당하다. 이 코스는 고대 왕들의 꿈이 묻혀 있는 경주의 대표적인 능과 고분을 중심으로 신라시대 왕족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경주 동궁과 월지(안압지)를 거쳐 1천4백여 년 전에 만들어진 신라의 우주과학 집성체인 첨성대에서 황룡사지에 이르기까지 신라시대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볼 수 있는 코스다.
‘도심의 숨은 유적 찾기’(난이도 하, 17.23킬로미터) 코스도 가족단위의 여행자들이 즐겨 볼 만하다. 삼랑사지 당간지주에서 시작해 김유신장군 동상과 용강동고분, 백률사와 탈해왕릉, 헌덕왕릉 등 서경주역과 경주시청 부근의 도심 유적지를 찾아나서는 길이다.
25킬로미터에 달하는 ‘신라의 흥망성쇠를 찾아서’ 코스는 신라의 시작과 끝을 지켜본 남산에 산재한 유적지를 찾는 코스. 신라 최초의 왕 탄생설화가 담긴 나정과 6부촌 시절의 촌장들을 모신 양산재, 신라 최초의 궁궐이었던 창림사와 신라 최후의 왕인 경애왕이 견훤에게 항복했던 포석정지 등을 둘러보게 된다.
이 밖에 숙련된 라이더라면 도전해 볼 만한 ‘신라 통일의 자취를 하이킹으로 찾는다’(20킬로미터) 등의 코스가 마련돼 있으니 흥미와 수준에 맞춰 선택하면 된다.
꼭 경주시에서 마련해 놓은 코스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황남동 대릉원 앞 신라문화체험장에서 시작해 첨성대와 계림, 월성, 선덕여왕릉을 거쳐 수오재와 진평왕릉, 분황사, 황룡사 9층 목탑지를 돌아 다시 시작점으로 오는 순으로 코스를 잡으면 경주 문화유적지의 하이라이트를 한 번에 돌아볼 수 있는 최적의 코스가 된다. 13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달리기 때문에 초보자도 그리 힘들이지 않고 알차게 여행할 수 있다.
시내권에서 10분 거리의 보문호는 적당한 언덕과 내리막길, 평지가 아름다운 호수와 함께 펼쳐져 달리기 좋다. 9킬로미터에 달하는 호숫길을 따라 신나게 달리다 보면 어느새 일상의 스트레스는 저만치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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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차게 페달을 밟고 경주의 오래된 시간들과 만났다면 이제는 미식의 세계와 만날 차례다. 경주에서 꼭 한 번쯤은 맛봐야 할 음식이 몇 가지 있는데, 봄철의 까칠한 입맛을 되살려 줄 쌈밥과 경주 최부잣집 가정식 요리를 내는 ‘요석궁’의 한정식, 그리고 한밤중에 맛보는 콩나물해장국 등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쌈밥이다. 탁탁 물기 턴 상추 한 장, 쌉싸래한 맛의 겨자채 한 장, 쑥갓 한 대에 민들레 두어 장을 손바닥에 켜켜이 들고는 그 위에 흰밥 한 숟가락 턱 얹고, 고소한 쌈장 조금 넣고 빨갛게 무쳐 달달 볶은 돼지고기 한 점 얹어 양 손으로 잘 여민 다음 입을 앙 벌려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지도록 밀어 넣고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요리조리 씹으면 어느새 입 안 가득 고소한 상추맛, 짭짤한 쌈장 맛이 차례로 감돈다.
경주의 역사가 모여 있는 황남동, 천마총과 대릉원 등이 늘어선 이 거리 한쪽에 경상도식으로 한 상 잘 차려져 나오는 쌈밥집 거리가 형성돼 있다. 맛으로 소문난 집은 이풍녀구로쌈밥과 삼포쌈밥 등이다.
이들 쌈밥집은 푸짐한 반찬에 제철에 나는 신선한 야채로 상을 차려 낸다. 경상도식으로 짭짤하게 간한 반찬과 구수한 된장찌개, 콩비지와 멸치젓갈, 어리굴젓, 된장, 갈치속젓 그리고 굴비 한 마리, 돼지고기볶음, 몇 가지 나물무침, 묵은지와 시원한 백김치, 장아찌 등 20여 가지 반찬과 장류가 상 위에 주룩 깔린다.
쌈밥의 핵심은 쌈장이다. 보통 된장과 고추장을 적당한 비율로 섞고 다진 마늘과 참기름, 깨소금 등을 넣는데 어떤 집은 여기에 여러 가지 견과류를 다져 넣기도 한다. 보통 상추나 깻잎 등 날로 먹는 쌈에는 쌈장이나 막된장을, 다시마나 양배추, 머윗잎 등 삶은 야채 쌈에는 젓갈류를 올려 먹으면 맛있다.
1천년의 시간이 고여 있는 경주 교동의 골목길을 돌아 솟을대문 하나를 젖히고 들어서니 ‘딩딩’ 가야금 소리가 흘러 나온다. 아름답고 단정한 정원에도, 기와지붕과 대청마루에도 시간의 정갈함이 느껴지는 집이다. 이곳이 바로 요석궁이다.
요석궁은 조선 말엽부터 3백여 년 동안 12대째 부자 명성을 이어온 경주 최부잣집 가문의 마지막 ‘최부자’로 불리는 최준의 동생 최윤의 집이다. 이곳에선 최부잣집 전통으로 내려오는 가정식을 맛볼 수 있다.
일단 상에 오르는 기본 장류에 눈이 먼저 간다. 이 집 며느리가 손수 제조하는 육장과 집장, 멸장이 그것들이다. 잘 말린 태양초 고추장에 신선한 한우를 갈아 넣은 소고기 고추장 볶음인 ‘육장’은 흰 쌀밥에 얹어 먹어도 그만이다. 메주에 다시마와 부추, 무, 한우 등을 넣고 눌어붙지 않도록 계속 저어 가며 약한 불로 10시간 이상 졸여서 만드는 ‘집장’은 담백하면서도 풍부한 향이 일품이다. 그늘에 말린 무와 멸치를 고추장 양념해 대여섯 시간 졸여 만든 멸장은 비리지 않고 산뜻하다.![]()
김치도 독특하다. 특히 붉은빛 고운 국물이 자작한 물김치인 ‘사인지’는 신선한 해산물과 석이버섯, 생률 등 20가지가 넘는 재료가 시원하고 맛깔스럽게 어우러졌다.
이 김치는 전국에 흩어져 살던 최부잣집 며느리들이 큰 명절 때면 종갓집에 모여 함께 물김치를 담그는 전통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씹는 맛이 일품인 어만두에 이어 와인에 절인 삼겹살, 향 좋은 자연송이 얹어 간장 양념해 졸인 전복구이와 해풍에 잘 말려 수증기로 쪄 냈다는 굴비구이는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맛이다. 여기에 소고기와 명태전, 미나리전과 몇 가지 야채를 사골국물에 넣어 끓인 신선로는 국물이 시원하고 담백하다. 도토리묵을 잘 말려 볶아 낸 묵잡채, 마를 갈아 얹어 구운 가리비구이에 황태장아찌 등등 2백년 역사를 가진 끝없는 요리의 향연은 이 봄 경주여행을 더욱 푸짐하게 장식한다.
글·고선영 (여행작가) / 사진·김형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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