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바람의 끝자락에 매달린 달콤한 향을 좇아 만경강변에 이르니 바로 완주군 삼례읍이다. 전주시내에서 지척인 삼례읍 들녘에 서니 이곳이 바로 달달한 냄새의 진원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줄지어 길게 늘어선 비닐하우스마다 온통 딸기, 딸기뿐이다.
요즘은 딸기 수확의 끝자락. 비닐하우스마다 분주한 손길이 가득하다.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니 탐스러운 붉은 빛의 딸기가 줄기마다 주렁주렁 달라붙었다. 흰 꽃과 초록 잎사귀 위로는 꿀벌이 붕붕 날아다니고 그 아래로 먹음직스럽게 익은 빨간 딸기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한창때인 초봄을 조금 넘겨 맛이 덜하다며 겸손해하는 촌로가 건네준 딸기를 하나 얼른 입에 넣고는, 이내 농부를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딸기는 봄의 싱그러움 그 자체였고 꿀맛이었다.
지나치지도,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은 딱 알맞은 달고 새콤한 맛이었다.
이게 덜한 맛이라면 도대체 한창때의 딸기는 어떤 맛이란 말인가. 딸기 맛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농부는 이내 태도를 바꿔 삼례 딸기의 자랑에 나섰다. “삼례읍 만경강변의 비옥하고 질 좋은 황토에서 자란 딸기가 전국 최고라는 것”과 “비타민이 풍부해 봄을 맞은 나른한 몸의 기운을 보충하는 데 좋다”는 이야기다.
매년 3월 말이면 삼례의 들판은 딸기축제로 욱실욱실 들썩인다는 소식도 전해 준다. 실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올해 유난히 비싼 딸기값의 원인을 알고 싶어서다. 그런데 딸기 맛에 홀랑 정신이 팔려 정작 궁금해한 것은 묻지도 못했다.
길을 나선 김에 완주 대아수목원으로 향했다. 봄이면 온통 자홍색의 산철쭉이 붉은 물을 들이고 전국 최대 규모의 금낭화 자생군락지에 분홍 꽃이 만발하는 완주의 자랑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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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기다리는 꽃은 물론 이뿐만이 아니다. 땅을 향해 홍자색 꽃을 피우는 백합과의 얼레지와 보라색이나 연분홍색의 입술 모양을 가진 꽃을 피우는 현호색, 독성이 강해 잘못 먹으면 미치광이가 된다는 ‘미치광이풀’ 따위의 풀들이 수목원 여기저기에 꽃을 피워 댄다.
더불어 벚꽃이나 튤립, 개나리도 이 봄의 주인공이다.
해발 5백18미터의 산자락 아래 들어앉은 대아수목원은 본래 전국에서 손꼽히는 오지였다. 화전민조차 일구던 밭을 버리고 나간 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던 터라 자연생태계가 잘 보전돼 있어 수십 종의 야생 동물이 살고 있다. 이곳은 아이들과 함께 찾기에도 좋다.
연중 무료로 수목원 둘레길의 숲을 해설가와 함께 걸으며 재미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수목원 내에는 숲과 나무, 식물 등에 관한 자료실이 잘 갖춰져 있다. 게다가 엄청난 규모의 유리 온실에는 바나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열대 나라에서 건너온 나무들도 가득하다. 수목원 산책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 시냇가에선 와글와글 큰 소리가 나는데 이곳을 들여다보면 개구리떼를 만날 수 있다.
전주와 이웃한 완주의 남쪽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이 두 지역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한지다. 후백제에서 조선왕조까지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전주의 문화적 핵심과 닿아 있는 한지는 이웃한 완주와 ‘한지로드’로 연결된다.
완주 한지의 중심지는 소양면 신원리 대승마을이다. 이곳은 조선 선조 이후 1990년대까지 마을의 가장 주된 소득원이 한지일 정도로 주민 대다수가 한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 대승한지마을은 완주군이 전국 최고의 한지 생산지로 명성을 날렸던 소양면 3개 마을의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1만3천4백20제곱미터(약 4천평) 부지에 전통한지 제조 체험관, 전시장, 닥나무 건조처리장 등을 조성한 곳이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수의 마을 사람이 한지 제조로 생계를 유지했고 지금도 대를 이어 한지 제조를 하는 한지 장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마을 일대에는 1930년대 일본 강점기 시대에 전주와 완주 지역에서 제조된 한지를 모아 전국 곳곳으로 판매했던 동양산업사(한지조합)의 사택과 당시 한지를 만드는 초지공들의 숙소인 줄방, 한지공장인 지소(紙所) 등의 유적이 복원돼 있는데, 지소 안에서는 곽교만씨가 종이 뜨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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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한지를 만들어 왔다는 그는 마침 전통 방식의 외발 기법으로 커다란 나무통 안에 물과 함께 섞여 있는 닥섬유를 촘촘한 망에 거르며 종이 뜨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의 진지하고도 완숙한 손놀림은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그에게서 한지 만드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한지 한 장을 만드는 데 사람의 손이 백번 이상 가야 하기 때문에 한지를 일컫는 말인 ‘백지’를 흰백(白) 자와 동시에 일백백(百) 자를 쓴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지는 오래된 미래’라고 덧붙이는 그의 설명을 들으며 한참 동안 빛 고운 한지의 색상과 은은한 향에 빠져 있었다.
4월의 중순 즈음 완주 소양면의 송광사로 여행길을 잡으면 팝콘처럼 흩날리는 흰 꽃비를 맞을 수 있겠다. 전주에서 완주를 거쳐 진안까지 이어지는 국도 26호선상의 소양면 마수마을에서 송광마을까지 2킬로미터에 이르는 길 양옆으로 45년생 벚나무가 빼곡이 늘어서 있다. 이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올라 있지만 경남 하동 쌍계사, 경주, 제주 서울 여의도 등등 벚꽃 명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아는 사람만 찾던 이 멋진 길이 올해부터는 유명해질 것 같다.
오는 4월 13일부터 사흘간 소양면 주민들이 주축이 돼 첫 번째 벚꽃축제를 펼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 길 위에서 잠깐 잊고 살았던 순수했던 시절을 추억해 보고 순천 송광사와 이름이 같은, 신라시대 때 창건된 완주 송광사도 함께 들러보며 아늑한 절집의 봄 정취에 마음을 남겨 두기로 한다.
전주에서 완주로 이어지는 봄 여행의 마지막인 완주의 가장 북쪽 대둔산은 완주의 가장 북쪽, 충남 금산과 논산시에 걸쳐 뻗어 있는 해발 8백78미터의 그림 같은 산이다. 고려한지의 맥을 잇는 대승마을. 다양한 한지관련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임에도 산자락을 따라 기암괴석의 봉우리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데다 바위와 봉우리마다 여러 전설을 지니고 있어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본래 대둔산은 가을날의 울긋불긋 단풍이 굉장히 유명하지만 볕 좋은 봄날의 산 여행에도 좋다. 멀리서 바라본 봄의 숲은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듯 보이기도 한다. 정상까지는 3시간30분 정도의 산행을 하거나 케이블카를 이용해 단숨에 올라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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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에서 내려 숨을 헐떡이며 가파른 계단을 10분쯤 올라가면 유명한 금강구름다리가 나타난다. 금강통문을 가로질러 임금바위와 입석대를 잇는 이 구름다리는 길이 50미터, 폭 1미터, 높이 80미터로서 삼선계단과 함께 대둔산의 명물로 알려져 있다.
금강구름다리를 건너는 일은 꽤나 무섭다. 가끔 금강다리를 앞두고 서로에게 앞장서라며 실랑이하는 부부도 목격된다(!). 크게 흔들리지는 않지만 워낙 까마득한 높이에 매달렸는지라 다리 위에서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일엔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 두려움을 떨칠 수만 있다면 그 다리 위에서 보이는 풍경에 왜 이 산을 ‘호남의 금강산’이라 칭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금강구름다리는 시작에 불과하다. 삼선계단은 한술 더 뜬다. 커다란 바위를 기어 올라가는 형국의 이 계단은 말이 계단이지 경사도 ‘51도’의 무시무시한 사다리다. 구름다리 끝 편에 앉아 삼선계단을 오르는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삼선계단을 올라 조금만 더 가면 대둔산의 정상인 마천대에 이를 수 있다.
글·고선영 (여행작가) / 사진·김형호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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