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2008년 8월 23일 중국 베이징 국가실내체육관. 헝가리와의 2008 베이징올림픽 여자 핸드볼 3, 4위전이 끝난 뒤 한국팀 골키퍼 오영란(37·벽산건설)은 코트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아쉬움과 후련함이 뒤섞인 눈물이 쉴 새 없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이날 대표팀 임영철 감독은 경기 종료를 1분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작전 시간을 요청해 오영란과 함께 오성옥, 허순영, 홍정호, 박정희 등 서른을 훌쩍 넘긴 고참들을 코트에 투입했다. “마지막을 너희가 장식해라”라는 말과 함께. 앞으로 더는 올림픽 무대에 설 수 없는 고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올림픽이 끝나고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던 오영란이 이제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던 실업 핸드볼 무대에서도 떠난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부터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4회 연속으로 올림픽 무대에서 한국팀의 골문을 든든히 지킨 오영란은 최근 선수 생활을 접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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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완전히 핸드볼과 연을 끊는 건 아니다. 벽산건설 핸드볼팀 임영철 감독은 11월 11일 “오영란이 다음 시즌부터는 벽산에서 코치로 활약한다. 선수 시절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영란이 은퇴 경기조차 없이 갑작스럽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건 복중 태아 때문이다. 오영란의 남편인 강일구(33·인천도시개발공사)는 “아내가 임신 5주째로 내년 6월 말이 출산 예정이다. 딸 서희(3)에 이어 둘째를 보게 됐다”고 귀띔했다.
1991년 신갈고 입학과 동시에 핸드볼에 입문한 오영란은 한 개도 힘들다는 올림픽 메달을 3개(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나 수집했다. 스물넷에 처음 출전한 올림픽(1996 애틀랜타)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오영란은 2004 아테네올림픽에서 은메달을,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순발력과 유연성이 뛰어난 그는 올림픽 때마다 ‘선방 쇼’를 펼쳤다. 특히 베이징올림픽 예선에서는 경기당 10개가 넘는 선방을 기록하고 골까지 기록하면서 한국의 본선행을 이끌었다. 팬들은 그에게 ‘통곡의 벽’ ‘골 넣는 골키퍼’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최고의 활약을 펼쳤음에도 금메달과 인연이 없었던 게 선수 생활을 돌이켜 두고두고 남는 아쉬움이다.
유명세는 뒤늦게 얻었다. 핸드볼 인기가 미미한 한국에서 그가 이름을 떨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가 인기를 얻은 건 2007년 영화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통해서다. 아테네올림픽 당시 여자 핸드볼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그는 임오경(서울시청), 오성옥(오스트리아 히포방크) 등과 함께 ‘핸드볼 스타’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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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여 년간 핸드볼에 인생을 걸었다. 서럽고 힘든 일도 많았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1년여 간이나 핸드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다. 2003년 3월 오영란은 소속팀 광주시청 핸드볼팀 선수들이 감독 인선 문제로 훈련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대표팀의 허락을 받고 광주로 내려갔다. 당시 아테네올림픽 아시아 예선을 준비하기 위해 소집된 대표팀은 3월 28일 전지훈련차 출국할 예정이었지만, 출국 열흘 전 광주로 내려간 오영란은 소속팀 문제가 악화되면서 대표팀에 복귀하지 않았다. 큰언니로서 후배들을 놔두고 혼자 떠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오영란은 대표팀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했지만 대표팀 복귀 기한을 어기고 무단이탈했다는 이유로 2003년 5월 핸드볼협회로부터 1년간 출전 정지라는 징계 처분을 받았다. 다행히 핸드볼협회는 징계를 받은 기간도 많이 지난 데다 과거 국가대표로 뛰어난 공적을 쌓았다는 점 등을 고려해 이후 사면 결정을 내렸다.
18년간 청춘을 바친 핸드볼이 그에게 준 최고의 선물은 바로 남편이다. 그의 남편은 남자 핸드볼대표팀 수문장 강일구. 둘은 2000년 초 나란히 시드니올림픽 국가대표팀에 뽑혀 불암산 등반 훈련을 하면서 차츰 친해졌고, 마침내 결혼에 골인했다.
네 살 연하의 남편에 대해 오영란은 “핸드볼을 하면서 얻은 최대 수확이 남편이 아닌가 싶다. 내가 무뚝뚝한 편인데, 남편은 유머 감각이 있다”며 “2003년 10월부터 6개월간 노르웨이 프로팀에서 뛰었는데, 당시 통화를 자주 하는 바람에 국제통화료가 많이 나와 결국 벌어온 돈은 1백원 정도뿐인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활짝 웃었다. 남편 강일구 씨는 “아내가 시속 1백 킬로미터가 넘는 공을 온몸으로 막아낼 때마다 정말 안쓰러웠다. 이제는 공을 안 맞아도 되는 게 가장 기쁘다”며 즐거워했다.
은퇴는 서럽지만 반가운 것도 있다. 딸 서희와 오롯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매일 이어지는 경기와 훈련 때문에 오영란은 서희를 보는 날이 1년에 손꼽을 정도였다. 베이징올림픽 때도 오영란은 틈만 나면 전화기를 손에 들고 서희에게 전화를 했지만 서희는 “엄마? 엄마야? 싫어, 싫어” 하면서 전화기 저 멀리로 도망가기 일쑤였다. 시속 1백 킬로미터로 날아오는 커다란 핸드볼 공은 아무렇지 않게 온몸으로 막아내면서도 아이의 말 한마디에는 바늘에 찔린 듯 아프게 반응하던 오영란이었다.
오영란은 출산 후 벽산건설에서 코치 수업을 받는다. 핸드볼 실업팀에는 여성 감독이 임오경(서울시청)뿐이지만, 오영란은 차근차근 코치 수업을 받아 여성 감독의 계보를 잇겠다는 각오다.
글·온누리(중앙일보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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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