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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091110호

이한우 기자의 역사 읽기 - 예나 지금이나동료 잘 만나야

 

위계질서가 엄중한 조직생활을 해야 하는 벼슬살이에서는 상하(上下)의 궁합이 잘 맞아야 한다. 개인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을 잘못 만날 경우 횡액(橫厄)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물론 동료 또한 잘 만나야 관운(官運)이 제대로 보존될 수 있다.

태종이 즉위한 이후 첫 번째 문과(1402년 임오 식년시)에서 장원급제한 사람은 신효(申曉)다. 신효를 보면 전형적으로 윗사람(국왕이나 상관)과 궁합이 맞지 않았고 동료 복(福) 또한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문과에 급제한 지 2년 후인 1404년(태종 4년) 1월 신효는 사간원(司諫院) 우정언(右正言·정6품)으로 발령을 받는다. 장원급제자로서 이제 막 조선 관리의 ‘엘리트 코스’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었다. 사간원은 일찍부터 국왕을 향해 간(諫)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우정언의 직급은 낮아도 국정 전반을 살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불과 석 달 만에 신효는 사간원 동료였던 좌정언(左正言) 노이(盧異)로 인해 관직생활을 일찌감치 끝맺게 된다. 노이는 신효보다 6년 빠른 1396년(태조 5년) 병자 식년시에서 급제해 사관(史官)을 지냈고, 이때 좌정언으로 있었다. 태종은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는 노이를 부담스러워하면서 그 기개를 아껴 사간원에 배치했다.
 

노이의 지나친 강직(剛直)이 문제였다. 노이는 이신과 김보해라는 장수가 임금의 총애를 얻기 위해 여색(女色)을 상납하는 것을 사간원이 알고 묵인하는 것은 안 되니 문제를 제기해 이신과 김보해를 처벌해야 한다고 발의했다. 하지만 주상의 ‘은밀한 사생활’과 관련된 것이라 대부분의 동료들은 그 의논에 참여치 않겠다고 했다. 오직 우정언 신효만이 노이의 손을 들어주며 동참 의사를 밝혔다. 1404년 4월 하순경의 일이다.
 

얼마 후에는 선배격인 좌헌납(左獻納·정5품) 박초(朴礎)도 뜻을 함께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박초는 엉뚱하게도 대선배인 좌사간(左司諫·종3품) 조휴(趙休) 등을 탄핵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노이는 사간원의 직무는 시정(時政)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지 동료를 탄핵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반대했다. 심성이 곧지 못했던 박초는 자신의 뜻이 좌절되자 거꾸로 조휴 등과 결탁해 노이와 심효가 지존(至尊·임금)의 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목을 걸어 두 사람을 탄핵했다.
 

5월 1일 노이와 심효를 탄핵하는 조휴 등의 상소가 올라오자 태종은 아무런 답도 내리지 않았다. 노이와 신효가 문제 삼으려 한 여색 상납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틀 후 재차 사간원의 상소가 올라오자 태종은 노이와 심효 두 사람을 직접 불러 전후 사정을 듣는다. 두 사람 모두 사실대로 이야기했고 임금을 위해서라도 여색문제는 직간(直諫)하는 것이 자신들의 도리라고 믿는다고 했다. 고민에 빠진 태종은 두 사람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신하들의 반대가 거셌다. 결국 노이는 직첩(관리자격증)을 회수당했고 자손들의 관리 진출 길도 영구적으로 제한당했다. 심효의 경우 주동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연안부(延安府)에 안치됐다. 유배형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2년 후에는 두 사람 모두 태종의 명에 따라 사면됐다.

 


 

이후 신효의 행적이 흥미롭다. 유배에서 풀려난 신효는 서울 근처 행주에 거처를 마련하고 살면서 한양 도성은 절대 밟지 않았다. 세조 때 81세로 죽었다 하니 세종 시대도 외면한 셈이다. 사실 세종은 신효를 등용할 생각이 있었다. 세종 8년(1426) 12월 14일 세종이 신효를 교수관(敎授官)이라는 자리에 복직시키려 하자 사헌부에서 이를 지적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세종은 ‘지존 비방’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신하들의 반대에 밀려 결국 신효를 쓰지 못했다.
 

반면에 태조 2년(1393) 조선 최초의 문과에서 여덟 번째로 급제한 신효의 형 신개(申 ·1374~1446)는 기개와 학식, 그리고 이재(吏才)가 적절한 조화를 이뤄 세종 때 좌의정에까지 오른다. 태조가 실록을 보려 하자 좌절시킨 기개, 세종의 필생의 업적인 <고려사> 편찬을 주도한 학식, 그리고 관찰사와 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이재 등이 그것이다. 이를 보더라도 강직한 성품의 신효가 일찍부터 엉뚱한 일에 휘말려 시대와 불화(不和)한 점은 개인을 위해서나 조선을 위해서나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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