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한양과 경기 동부, 강원도를 이어주던 관동대로는 조선시대의 9대 간선도로 중 제3로였다. 이 길은 한양 흥인문을 출발해 대관령을 넘고, 강릉 안인역과 삼척 사직역, 용화역, 소공령, 월천리, 갈령, 울진 망양정 등을 두루 거쳐 평해에 이르는 대로였다.
전체 길이 9백20리의 관동대로 가운데 동해의 쪽빛 바다와 해안 절경을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선의 명재상 황희의 자취가 서린 삼척 구간 60리(24킬로미터)는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생태 탐방로로 지정됐다.
관동대로 삼척 구간은 ‘수로부인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수로부인은 신라 제33대 성덕왕 때 강릉태수를 역임한 순정공의 아내다. <삼국유사> ‘수로부인전’에는 이런 설화가 전해온다.
강릉태수로 임명된 순정공이 수로부인과 함께 강릉으로 향하던 중 어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득한 높이의 바위 벼랑이 우뚝 솟았고, 벼랑 위에는 붉은 철쭉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것을 본 수로부인이 “누가 저 꽃을 꺾어다 내게 주지 않겠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 절벽은 사람이 발붙일 데가 못 됩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때마침 소를 끌고 그곳을 지나던 한 노인이 수로부인의 말을 듣고 절벽에 기어올라 꽃을 꺾어 바치며 헌화가를 불렀다.
이틀 뒤 순정공 일행은 또 어느 바닷가의 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갔다. 크게 놀란 순정공이 주변 사람들에게 부인을 구할 묘책이 없느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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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인이 말하기를 “옛말에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 했는데, 이 바다짐승이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백성을 불러모아 해가(海歌)를 부르게 하고 몽둥이로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이 풀려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 말대로 했더니 바다에서 나온 용이 부인을 풀어줬다. 수로부인은 워낙 용모와 자태가 아름다워서 그 뒤로도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차례 신물(神物)들에게 잡혔다가 풀려나곤 했다.
당시 강릉으로 향하던 순정공과 수로부인의 실제 노정(路程)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동해안의 남북을 가로지른 교통로였던 관동대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노정을 밟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관동대로 삼척 구간이 수로부인길이라 명명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삼척시의 맨 북쪽 해안인 증산해수욕장에는 해가사터비와 임해정, 드래곤볼 등이 설치된 수로부인공원도 조성돼 있다.
삼척은 산다운 산, 바다다운 바다를 품은 고장이다. 창망한 동해바다는 어딜 가나 쪽빛으로 일렁이고, 백두대간과 맞닿은 산줄기는 기운차고 늠름하다. 삼척 땅의 산과 바다는 서로 맞닿아 있다.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바다가 출렁이고,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곧바로 기세등등한 산줄기가 시작된다. 삼척 동해안을 가로지르는 수로부인길도 바닷가를 걷거나,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산길 구간이 많다. 그래서 눈맛이 상쾌하고 가슴이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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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부인길 제1코스엔 ‘옛이야기 속으로’라는 부제가 붙었다. 해안선이 아름답고 바닷물이 깨끗하기로 소문난 용화해수욕장이 있는 용화리에서 길이 시작된다. 용화리는 여름철만 되면 피서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여름철뿐만 아니라 사시사철 손님맞이에 분주할 성싶다. 궁촌~용화 사이 5.4킬로미터의 옛 철도부지에 복선 해양 레일바이크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해안선을 따라가는 이 레일바이크는 오는 6월부터 본격 운행될 예정이다.
수로부인길 안내판이 서 있는 장호초교 앞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아칠목재 고갯마루까지는 개통된 지 얼마 안 된 시멘트도로가 지루하게 이어진다. 옛날에 이 고갯길은 숲이 울창해 산적과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래쪽 주막에서 여러 사람이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넘었다고 전해진다. 그래도 언제 산적이나 호랑이가 나타날지 몰라서 아찔한 마음으로 넘어 다녔다고 해서 아칠목재라 불렸다고 한다.
이 고갯마루에는 옛 사람들이 남긴 국시뎅이 흔적도 남아 있다. 국시뎅이는 옛날에 고갯길을 넘던 사람들이 무사안녕을 빌며 하나둘씩 주워 올린 돌로 쌓인 돌무더기, 즉 돌서낭을 가리키는 이 지역 방언.
시멘트도로는 고갯마루를 넘어 가파른 내리막길을 약 3백 미터쯤 더 내려가서야 끝난다. 다시 오래된 옛길로 들어서자마자 갯버들 군락지가 시작된다. 오래도록 묵혀둔 논이 자연습지로 탈바꿈해서 갯버들 군락지가 된 것이다. 사람 손을 타지 않으면 자연은 원래의 모습을 제 스스로 되찾아간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갯버들 군락지를 지나 3백~4백 미터 계속되던 오솔길이 끝나고 다시 삭막한 시멘트도로가 시작된다. 그래도 제1코스의 종점인 임원리 절터골의 성황목까지 가는 길은 줄곧 계곡의 물길과 나란히 이어진다.
시원한 물소리를 벗 삼아 걷는 길이라, 발걸음도 가볍고 기분도 상쾌하다. 작고 소박한 성황당 옆에 우뚝 서 있는 성황목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겉모습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마을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연륜이 느껴진다.
성황목에서 시작되는 제2코스는 ‘황희 정승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길의 중간에 황희 정승과 관련된 소공대가 있다. 아흔 살 넘도록 장수한 황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약 60년 동안 무려 여섯 임금을 섬기며 위국애민(爲國愛民)을 실천한 청백리였다. 그리고 소공(召公)은 중국 주나라 때 태평성대를 구가한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인데, 나중에는 왕을 도와 국가를 튼실히 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 인물들의 대명사가 됐다.
황희는 전국적으로 기근이 들어 피해가 극심했던 1423년에 강원도관찰사를 제수받았다. 그는 강원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청에 보관된 곡식을 풀어서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백성들을 구휼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에는 자신의 재산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당시 삼척지방은 기근이 특히 심했지만, 백성들에 대한 황희의 각별한 애정과 보살핌 덕택에 굶어죽은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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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삼척 주민들은 황희 관찰사가 쉬었던 산중턱에 돌탑을 쌓고, 그 자리를 소공대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소공대에 남은 소공대비는 우리나라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독특한 선정비로 평가된다. 지금도 소공대 자리는 동해 바다와 삼척 임원항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전망이 상쾌해서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수로부인길에는 의외로 숲길이 많지 않다. 2002년 영동지방을 휩쓴 대규모 산불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 날씨가 덥고 햇살이 따가운 날에는 적잖이 고생스럽다. 하지만 일망무제의 동해 바다를 굽어보노라면 가슴에 쌓여 있던 시름과 스트레스가 단번에 사라지는 듯한 통쾌함을 맛볼 수 있다.
산수 좋은 삼척까지 간 김에 수로부인길만 걸어보는 게 아쉽거든 대금굴과 준경묘도 들러볼 만하다. 신기면 대이리군립공원(관리소 033-541-7600) 내에 위치한 대금굴은 우리나라 모든 석회동굴의 아름다움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듯하다. 게다가 2003년에 처음 발견된 덕택에 종유석, 석순, 석회화단구, 베이컨시트, 동굴진주, 휴석 등 2차 생성물의 종류와 크기, 모양도 다양한 데다 보존상태도 거의 완벽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드는 자연의 조각품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며, 모노레일을 탄 채로 동굴 내부 1백40미터 지점까지 진입하는 것도 이채로운 경험이다.
미로면 활기리의 첩첩산중에 위치한 준경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의 묘이다. 묘역을 빙 둘러싼 숲에는 한 아름도 훨씬 더 될 만큼 둥치가 굵은 적송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나무들마다 어디 하나도 구부러지거나 뒤틀린 데 없이 자태가 곧고 미끈하다. 어찌나 키가 우뚝한지, 고개를 한껏 젖힌 채 올려다봐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곳 준경묘는 마을에서 30~40분 걸어야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교통이 불편하고 외진 곳에 있다. 그래서 언제 찾아가도 청징(淸澄)하고 고즈넉한 풍경만이 눈과 마음을 가득 채운다.
글과 사진·양영훈(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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