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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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중앙관리로 진출하려면 원칙적으로 3년마다 한 번씩 간지(干支)에 자(子) 묘(卯) 오(午) 유(酉)가 들어가는 식년(式年)에 실시되는 문과(文科 혹은 大科)에서 33명 안에 들어야 했다. 3년마다 식년에 실시된다는 점에서는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도 같았다.
관리가 되려면 먼저 식년 전해 가을에 실시되는 초시(初試)를 통과해야 했다. 문과 초시의 경우 성균관 유생(50명)과 한양(60명) 및 지방(1백40명)으로 미리 인원을 배분해 2백50명을 선발했다. 이렇게 선발된 이들은 이듬해, 즉 식년 봄에 3단계로 된 엄격한 시험인 복시(覆試)를 치렀다. 복시를 통해 33명이 선발되지만 우열은 임금 앞에서 치르는 전시(殿試)에서 정해졌다.
세조 때 정비된 규정에 따르면 일단 33명은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분등했다. 문과에 급제하더라도 전시에서 어떤 성적을 얻느냐가 결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최초의 식년시는 1393년(태조2년) 계유년(癸酉年) 봄에 있었다. 전시에서는 통상 정승급이 지공거(知貢擧)라는 선발 최고책임자를 맡고, 그 아래 지공거를 돕는 동지공거(同知貢擧)는 판서급이 맡았다. 조선의 관직에서 동(同)은 바로 아래 등급이라는 뜻이다. 계유년 문과의 지공거는 설장수( 長壽·1341~1399), 동지공거는 원현(元絃)이었다. 설장수는 아버지가 위구르에서 귀화한 인물로 조선 건국에 크게 기여한 이색적인 인물이다. 학식이 뛰어났고 중국어에 능통해 사역원(司譯院)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건국 초 인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태조 이성계와 설장수 등은 33명 중 최고를 뽑으면서 무엇을 염두에 두었을까?
개국 초였기 때문에 장차 조선의 종묘사직을 튼튼히 해줄 수 있는 미래의 정승감을 뽑으려 했을 게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계유년 6월 13일(이하 음력) 송개신(宋介臣)이 장원급제자로 뽑혔다. 그런데 너무나도 유감스럽게 송개신은 관직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왜 죽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태종3년(1403년) 11월 27일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이날 태종은 오늘날의 장군에 해당하는 대호군(大護軍) 송거신(宋居信)에게 자신이 좋아하던 기생 양대(陽臺)를 빼앗기자 당대의 실력자인 조영무의 집에 ‘송거신이 영무를 죽이려 한다’는 익명의 투서를 했다가 발각된 송개석(宋介石)을 곤장 1백 대를 쳐서 합포(지금의 마산)로 귀양 보냈다. 송개석은 송개신의 동생이다. 대신(大臣)과 관련된 거짓 투서는 당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다. 하지만 송개석의 늙은 어머니가 태종에게 “큰아들 개신은 죽고 개석만 남아 있사오니 부디 목숨만 살려 제사를 잇게 해주소서”라고 간청해 사형이 유배형으로 감형될 수 있었다.
반면 송개신이 장원을 했을 때 을과 7등으로 간신히 을과에 턱걸이한 이숙번(李叔蕃 ·1373~1440)의 관력(官歷)은 송개신과 대조적이다. 문과 급제 1년 후(1394년)에 좌습유(정6품으로 훗날 사간원 정언)에 오른 이숙번은 다시 4년 후인 1398년(태조7년) 8월 26세의 나이로 5품직인 안성부 지사(안성군수)로 있을 때 하륜과 함께 이방원의 쿠데타를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2등에 책록되고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다. 공을 세움으로써 벼락출세길이 열린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승진은 현기증이 날 정도다. 정난 열흘 후인 9월 5일 정3품 요직인 우부승지로 뛰어올랐고, 2차 왕자의 난 때도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1등에 책록됐다. 태종 즉위 후에도 군부 요직을 두루 맡았고, 40세인 1412년(태종12년)에는 3정승 바로 아래인 종1품 숭정대부로 승진해 1413년 병조판서를 지내는 등 정승(정1품)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태종15년 공신 보호라는 미명으로 요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듬해에는 불충 무례하다는 이유로 공신 자격을 박탈당하고 태종17년에는 경상도 함양으로 유배를 감으로써 완전히 중앙정계에서 사라지게 된다. 제아무리 공신이라도 지존(至尊)의 심기를 건드리고서는 예나 지금이나 살아남기 힘들다는 교훈을 남긴 인물이 바로 이숙번이다.
글·이한우(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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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