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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는 세로 23cm, 가로 108cm의 족자 형식을 빌려 그린 문인화다. 절제되고 생략된 화면에서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으려는 선비의 고졸(高拙)한 정신이 엿보인다. 왜냐하면 병제(竝題)에도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송백만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고 했듯이 황량한 세상에 지조 높은 선비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는 귀양살이하던 김정희(1786~1856)와 제자 이상적(1804~1865) 간의 끈끈한 사제(師弟)의 정이 흠뻑 배어 있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서화가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추사(秋史)이다.  30대 초반에 문과에 급제한 김정희는 처음에는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그러나 부친이 비인 현감을 지내면서 김우영을 파직시켰는데 그 일로 안동 김씨의 탄핵을 받아 김정희는 고금도(古今島)로 귀양을 갔다. 순조의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하며 안동 김씨가 다시 득세하자, 1840년 제주도 정포(靜浦)에 또다시 유배, 안치되었다.

세한도를 낳게 한 이상적은 김정희의 문인으로 <만학(晩學)과 대운(大雲)>이란 책을 중국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내주었다. 그 당시의 김정희는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한 채 언제 사약을 받고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김정희에게 귀한 책을 보내준다는 것은 여간한 각오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김정희는 제자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서 세한도를 그려 인편을 통해 보내주었는데, 제주도로 유배된 지 5년째 되던 1844년이며 그의 나이 59세였다.

이 그림이 고졸한 문향을 뽐내며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45년 이전의 일이다. 경성제국대학의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藤塚   ·1879~1948)에 의해서다. 그는 운 좋게 그림을 입수하고는 틈만 나면 세한도를 들여다보며 살았고, 그림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여 문학박사 학위 논문을 청구할 정도였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거세지고,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후지즈카는 세한도를 가슴에 품은 채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그림은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다시 고국의 품에 안겼다. 소전(素筌) 손재형(1903~1981)이 그 사람이다.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그는 배짱 하나로 병석에 누워 있는 후지즈카의 집을 매일같이 찾아가 병문안을 했다. 말이 병문안이지 사실은 세한도를 문안한 셈이다. 그러기를 100여일 가까이, 손재형은 결국 세한도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갖은 고생 끝에 되찾아온 세한도는 그 후 너무나 어이없이 또 다른 주인을 찾아 방랑해야 했다. 정치를 한 손재형은 자금이 쪼들리기 시작했고, 그동안 수집했던 국보급 서화들을 하나둘씩 저당 잡히며 돈을 빌려 썼다. 결국 세한도는 개성 갑부인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그 아들인 손창근이 소장하고 있다. 이상적에 이어 후지즈카를 거쳐 손재형, 손세기로 바람처럼 옮아 다닌 세한도는 1974년 12월 31일 손창근을 소장가로 하여 국보 제180호로 지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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