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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091116호

소설가 문순태의 ‘삶과 영산강’







전라도 사람의 몸속에는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우리에게 영산강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며 행복한 일인가. 갠지스가 인도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강’이 되고 있듯 영산강은 전라도 사람들에게 ‘희망의 강’인 것이다.
 

영산강은 전라도 사람들의 한과 희망을 안고 흐른다.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고 흐른다. 어둠과 고난의 역사가 있었는가 하면 고통과 상처를 통해 도전과 의지를 배울 수 있었고 미래의 빛나는 꿈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래서 영산강은 꺾일 줄 모르는 전라도의 힘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은 영산강 물줄기에 몸과 마음을 적시고 살아온 전라도 사람들의 삶을 굳건하게 지탱해주었다. 영산강과 함께 흘러온 전라도의 한(恨)은 좌절과 체념의 한숨이나, 패자의 넋두리가 아니라 삶의 의지력이고 생명력이며 빛나는 희망이다.
 

영산강은 강을 끼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다. 농사를 짓는 농민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영산강에 삶의 둥지를 틀었다. 농토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갔다. 백제시대부터 양수척(揚水尺·후삼국으로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강변에 몰려 고리를 만들어 사는 고리백정)의 생활 근거지이기도 했다. 강변에는 농민들 외에도 백정이나 그릇을 굽는 옹기장이 등 천민들이 집단을 이루었다. 강변에 천민집단부락 부곡(部曲)이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강변 사람들은 해마다 되풀이되는 홍수와 가뭄과 싸워야 했다. 영산강은 나주까지 조수가 밀려오는 감조하천(感潮河川)으로 바닷물 재해가 많았고 홍수 피해도 컸다. 이 지역 주민들은 바닷물과 홍수 때문에 폐농을 하기 일쑤였고 목숨까지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좌절하지 않고 둑을 쌓아 피해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생명의 원천이며 젖줄인 강물 때문에 살아갈 수 있었지만 때로는 목숨을 걸고 강물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강과 함께 살아온 이들은 영산강 때문에 절망하기보다는 인내와 도전과 용기로 희망을 안고 살았다. 그 희망은 강인한 힘이 되었다.

 


 

1976년 나주댐을 비롯하여 담양댐, 장성댐이 완공되고 1981년 삼호면과 나불리 사이에 영산강 하굿둑을 막은 후부터 가뭄과 홍수, 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댐이 생겨서 농업근대화는 가져왔으나 많은 농민들이 고향을 잃고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는가 하면 차츰 강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영산강 하구언을 막을 때 우리 지역에서 축제를 열었다는 것은 수치이며 참으로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 북쪽 계곡인 가마골 용소에서 발원한 영산강 물길은 인간이 만든 마을과 도시와 바둑판같은 들판을 거쳐 서해로 흐른다. 장장 1백36.66킬로미터에 유역 면적 3천3백71평방킬로미터다. 3백 리 호남벌을 관류하면서 나주평야, 송정 일대의 서석평야, 학교평야를 적신다.
 

영산강 유역은 땅이 기름져 쌀농사 짓기에 적당하다. 영산강을 둘러싸고 펼쳐진 넓은 들판과 풍부한 수량, 따뜻한 기후 등 자연 지리적 조건은 이곳을 농경문화 중심지로 발달시켰다.
 

강은 강의 긴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인간들의 삶과 문화를 안고 있다. 자연이 만들어준 영산강 물굽이마다, 도시와 크고 작은 마을에 수많은 삶의 이야기들과 문화가 어우러져 있다. 이곳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다. 영산강 유역에는 청동기시대 고인돌 2만여 기가 집중 분포되어 있어 우리 고대 역사의 의문을 푸는 열쇠를 쥐고 있다.
 

특히 나주 반남 고분군의 대형 옹관무덤에서 부장품 등을 통해 6백 년 마한의 고유문화가 꽃피운 고장임이 확인되었다.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마한 지배세력이 왕에 버금갈 정도로 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한문화는 백제와는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영산강은 다도해가 어우러져 고대부터 물길과 바닷길이 발달해 농경문화와 함께 해양문화가 꽃을 피웠다. 영산강과 다도해가 만나고 농경문화와 해양문화가 어우러진 복합 문화권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 뱃길로 불교가 들어왔다. 영산강은 바닷길을 통해 들어온 문화를 수용하는 관문 역할을 해왔다.
 

그런가 하면 왕건이 후백제를 아우르는 과정에서 군사적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나주를 비롯한 호족 및 해상세력이 고려 건국에 기여를 한 것이다.
 

영산강이 관통하는 전라도는 역사 속에서 마한과 백제 멸망, 그리고 후백제 꿈의 좌절로 망국의 한이 서린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 멸망 후로 신라의 탄압과 끊임없는 백제 부흥운동 과정에서 저항정신이 싹트기도 했다. 후백제 견훤의 출현 이후, 민초들은 새로운 미륵세상을 염원하였다. 운주사 천불천탑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과 열망이 컸던 지역 정서가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과 멀리 떨어진 관계로 지배층의 수탈이 극심하여 민란이 자주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정여립 사건 이후 인재등용마저 차단되다시피 하여 정치적으로 소외와 함께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수탈을 참고 또 참아왔던 농민들이 끝내 생존을 위해 지배세력의 횡포에 맞선 항거였다. 영산강 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최후 보루였다. 지배세력의 핍탈에 이어 일제강점기 동안 영산강은 일제에 의한 수탈의 통로가 되었다.

 


 

1897년 목포 개항 이후, 일제는 영산강을 통해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쌀과 면화 등 농산물을 대량 본토로 실어갔다. 이 과정에서 목포항에서는 부두근로자들의 쟁의가 잇따랐다. 특히 일제는 영산강 유역의 기름진 땅을 무제한으로 차지하여 지주가 되었고 땅을 잃은 농민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나주 ‘궁삼면(宮三面) 농민운동’ 사건은 소작인으로 전락한 농민들의 대표적인 농민투쟁이다. 동양척식회사는 나주 왕곡면 등 3개면 농민들이 흉년으로 세금을 내지 못하여 궁토로 흡수된 토지를 모두 매입하였다. 이에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의 피나는 투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과정을 <타오르는 강>(1987년 창비·전 7권)이라는 소설로 형상화했다. 1886년 노비 세습제가 풀리자 이 지역의 많은 노비들은 영산강변으로 몰려 제방을 쌓고 홍수로 버려진 땅을 일구어 삶의 터전으로 만들었는데, 이 땅이 모두 동척 소유가 되자 일제에 항거하여 투쟁에 나섰다.
 

이처럼 영산강 지역 농민들의 식민지 수탈에 항거해온 민족 민중정신은 의병전쟁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씨앗이 되었고 5·18 광주항쟁으로 이어진다. 한편 영산강은 전라도 개화의 통로였고 근대 변혁의 물살 역할을 해오기도 했다.
 

이 같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민중 지향적 정서는 정치적 탄압과 소외 속에서도 찬란한 영산강문화를 꽃피웠다. 소외당하고 빼앗기고 짓밟힘을 당해온 민초들의 점액질 한은 판소리로 표출되었고 선비들의 은일과 서정은 가사문학과 서화를 발전시켰다. 영산강을 소재로 많은 문학작품도 창작되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풍류시인 임제의 시작품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 영산강 지역 농민들의 고단한 삶을 그린 박화성의 <한귀> <홍수전야>, 오유권의 <방앗골 혁명>, 제 졸작인 <타오르는 강> 외에 허연, 승지행, 김해성, 나해철, 이상문 등 영산강 주변에서 태어난 문인들이 영산강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영산강은 고대부터 한반도 내륙과 연안을 잇는 교통로로 중국, 일본과의 교류 관문이기도 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영산포에는 조창(漕倉)이 있어 전라도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세곡들을 뱃길을 이용해 경창(京倉)으로 옮겨갔다.
 

영산강 주운은 하구에서 74킬로미터 상류에 위치한 광주 광산구 서창까지 가능했다. 가항종점 영산포에는 8·15 직후까지만 해도 20, 30톤급 어선이 40~50여 척이 정박해 있어 성시를 이루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뱃길 48킬로미터 뱃길 운항이 비교적 활발했다. 이때는 백하와 황석어 등 해산물을 실은 배들이 들어와 나주평야의 쌀을 실어갔다. 영산포를 근거지로 해운수송이 활발했으며 나주, 영암, 무안, 신안 사람들이 영산포와 연결된 뱃길을 이용해 장사를 했다. 영산강 뱃길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1897년 목포 개항과 1912년 국도 1호선 개통, 1913년 호남선 개통 후부터다.
 

그러나 철도와 자동차도로가 개통되면서 점차 뱃길이 한산해졌다. 뱃길이 끊기면서 나루가 없어졌고 강과 사람의 교섭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1977년 전후로 목포~영산포 간 배의 왕래가 끊겼다.
 

뱃길이 끊기고 다양한 교통수단의 등장과 함께 다리가 놓여 강의 이쪽과 저쪽의 교통이 원활해지면서부터 나루터가 제 기능을 상실했다. 이와 함께 나루터 장시의 경제가 쇠퇴하고 강과 인간의 교섭이 단절되고 말았다.
 

뱃길이 활발했을 때 목포와 영산포 사이에는 5, 10리마다 크고 작은 나루 40여 개가 있었다. 이들 나루는 70년대까지만 해도 명맥을 이어왔으나 지금은 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영산강과 사람의 교섭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나루의 기능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뱃길이 복원된다면 나루터문화의 복원과 경제적 기능을 회복해 사람들을 강으로 불러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산강 유역권에 속한 지역의 5일장을 강변으로 이전하고 이미 폐쇄된 5일장도 살려야 한다. 이와 함께 인접지역 자치단체의 문화시설도 강변으로 옮겨 둔치를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는 영산강을 살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영산강 개발은 물속과 물 밖을 동시에 살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영산강을 이대로 방치해둔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강이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책임이다. 영산강을 살리는 일은 정치나 경제논리로 풀어서는 안 된다. 역사와 문화로 풀어야 한다. 문화의 힘은 정치와 경제를 아우를 수 있고 시공을 초월해서 가장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산강에는 마한, 백제, 고려문화의 유산이 많고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현장이며 개화문물의 유입로이자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문학 유산도 풍부하다. 지금 전국에서 영산강 문학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표지판 하나 없다. 뱃길관광이 무형적 자산이라면 문화유산은 그 실체를 보여줄 수가 있지 않겠는가.
 

얼마 전 팀 볼러 작 <리버 보이>라는 소설이 소개되었다. 흘러가는 강과 인간의 삶을 이야기한 소설이다. 강이 바다로 흘러가기 위해 거치는 여정을 인간의 삶에 적절히 대입시켜 인간과 강을 하나로 엮어가고 있다. 강이 흘러가는 과정을 인간의 삶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대화가 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이다’라는 말이다.

 


 

강의 흐름과 인간의 삶은 닮아 있는 것 같다. 강이 흐름을 멈추지 않듯 인간도 생과 사의 사이클이 끝없이 진행된다. 우리가 죽은 다음 우리 후손들은 영산강과 함께 흐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영산강은 죽어가는 과정이기에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영산강변에 아름다운 숲과 꽃길, 음악당과 미술관, 문학관이 들어서고 강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날을 상상해본다. 가족들과 함께 강변을 거닐고 장을 보고 미술전을 구경하고 음악과 시낭송을 감상하는 장면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전라도에 영산강 르네상스가 꽃피우는 시절을 생각한다.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 사람의 입장에서 영산강을 보지 말고 한번쯤 강이 되어서 영산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강이 되어 영산강을 본다면 엄숙해지고 경건해지고 사랑스러워질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강의 입장이라면 사람에게 무엇을 원할까. 사람이 강을 보호하는 것일까, 강이 사람을 보호하는 것일까.
 

이제부터는 영산강의 인문학적 가치와 비전을 말할 때다. 이 시대의 중심적 화두는 강을 통해 삶의 가치를 인식하고 배우는 일이다. 노령산맥이 전라도의 등뼈라면 영산강은 핏줄이며 강 주변의 숲들은 폐이고 바람은 숨결이다. 전라도의 핏줄인 영산강이 건강하게 흐를 때 우리의 삶도 행복할 수 있다.
 

이제 강의 흐름에서 느리게 사는 법을 깨달을 때다. 삶과 사랑과 꿈과 그리움이 흐르는 영산강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강과 인간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곧 우리의 희망이며 평화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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