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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090623호

충북 괴산 선유동계곡~화양동계곡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북도의 한복판에 위치한 괴산군은 ‘산고수청(山高水淸)의 고을’이다. 백두대간의 허리를 이루는 청화산(9백94미터), 조항산(9백51미터), 대야산(9백30미터), 백화산(1천63미터), 조령산(1천25미터) 등과 같이 해발 1천 미터 내외의 고봉들이 즐비하다. 그 고봉들 사이로 굽이쳐 흐르는 선유동계곡, 화양동계곡, 쌍곡계곡, 갈은계곡, 사담계곡 등의 계류는 거울처럼 맑고 얼음처럼 시원하다. 아무리 심한 삼복염천의 무더위도 기를 펴지 못할 정도로 서늘하다. 특히 선유동계곡과 화양동계곡은 그야말로 선경(仙境) 속에 옛 선인들의 자취가 또렷해서 여름철에 답사를 겸한 걷기여행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선유동계곡과 화양동계곡은 괴산군 청천면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른다. 두 계곡은 물길뿐 아니라 사람 다니는 길로도 서로 이어져 있다. 선유동계곡 최상류에 위치한 청천면 관평리 제비소마을에서 화양동계곡 최하류에 놓인 화양제1교까지는 약 10킬로미터에 불과하다. 느긋하게 걸어도 서너 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시종 빼어난 자연풍광 속에서 시원한 물소리를 벗 삼아 걷는 길이라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다. 게다가 길이 평탄하고 경사가 완만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걷기에도 좋다.
 

선유동계곡은 제비소마을에서 시작된다. 실개천 같은 물길을 사이에 두고 경상북도와 맞닿은 마을이다. 마을 앞의 선유교나 폭 5, 6미터의 물길만 건너면 경북 땅인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들어선다. 충북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고 충북도가 관리하는 517번 지방도는 잠깐 동안 경북 땅을 지나기도 한다. 인근에 백두대간의 굵은 산줄기가 우뚝한데도 굳이 이처럼 작은 물길을 도계(道界)로 삼은 까닭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제비소마을에서 선유동 입구까지의 선유동계곡은 길이가 2킬로미터에 약간 못 미칠 정도로 짧다. 하지만 계곡의 풍광은 정수(精髓)만 한자리에 모아놓은 듯 압축적이다. 조선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이 이름 붙였다는 선유구곡의 절경이 다 몰려 있다. 퇴계는 청천면 송면리 송정마을의 친척집에 놀러왔다가 이 계곡의 빼어난 산수에 매료된 나머지 아홉 달 동안이나 머물렀고, ‘신선이 노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의 선유동(仙遊洞)이라는 지명도 그가 붙였다고 한다.

선유동문, 경천벽, 학소암, 연단로, 와룡폭, 난가대, 기국암, 구암, 은선암이 선유구곡에 속하는 절경들이다. 그중 제6곡 난가대와 제7곡 기국암에는 아득한 옛적에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한 나무꾼이 난가대에 도끼를 놓아둔 채 기국암에서 신선들이 바둑 두는 모습을 구경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어느새 5대 후손이 집주인 노릇을 하고 있더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우리 속담도 거기서 생겨났다고 한다.

선유동계곡의 물길과 나란히 이어지는 찻길은 여름철 성수기가 아니면 차량통행도 허용된다. 그래서 차량이 몰리는 주말이나 휴일에는 다소 번잡해 걷기조차 불편하다. 하지만 물빛이 워낙 깨끗하고 풍광이 아름다워서 그런 불편함은 상쇄되고도 남는다. 선유동계곡의 제1곡인 선유동문을 지나온 길은 신선의 세계를 벗어나 다시 속세에 들어선다. 더욱이 선유동 입구 삼거리에서 송정삼거리, 송면삼거리를 거쳐 충북자연학습원 삼거리까지 2.5킬로미터 구간은 차량통행이 빈번한 찻길을 따라가게 되므로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충북자연학습원 앞을 지나면, 길은 다시 차량통행이 제한되는 화양동계곡 탐방로에 접어든다. 화양동계곡은 선유동계곡에 비해 숲도 한층 울창하고 계곡도 넓고 크다. 자동차 없는 숲길의 주인은 날짐승과 들짐승, 그리고 철 따라 피고 지는 들꽃들이다. 인기척에 놀라 급히 몸을 숨기는 다람쥐, 어치 등의 동물들이 이따금씩 눈에 띈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가 한결 가깝고 또렷하다. 게다가 매우 완만한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덕에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뿐하다.


산고수청한 괴산군을 대표하는 명소인 화양동계곡은 넓고 깨끗한 너럭바위와 맑은 계류, 우뚝한 기암절벽과 울창한 숲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곳이다. 마치 당대 최고 솜씨로 그려진 진경산수를 보는 듯하다. 일찍이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금강산 남쪽에서는 으뜸가는 산수’라며 화양동의 풍광을 극찬했다. 하지만 이곳의 절경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 대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은거지가 된 뒤부터였다. ‘우암’ 외에 ‘화양동주(華陽洞主)’라는 호(號)도 사용했던 송시열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경치가 빼어난 아홉 곳을 화양구곡이라 명명했다.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이 화양구곡에 속하는 절경들이다. 그중 제2곡 운영담은 ‘맑은 물에 구름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뜻으로 주자의 ‘천광운영(天光雲影)’이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리고 제3곡 읍궁암은 효종이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승하한 것을 크게 슬퍼하던 우암이 매일 새벽마다 엎드려 통곡했던 바위라고 한다.

물속에 금빛 모래가 깔려 있는 제4곡 금사담은 화양구곡의 으뜸가는 절경으로 손꼽힌다. 게다가 물가의 우뚝한 바위에는 우암의 독서재였던 암서재가 올라앉아 있다. 효종 6년(1655)에 처음 세워진 이 건물의 뒤쪽에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시야가 훤한 앞쪽으로는 화양동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과연 평정심을 유지하며 책을 읽는 것이 가능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화양동계곡에는 송시열을 배향한 화양서원이 들어서 있다. 조선 팔도에서 가장 위세 높은 서원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은거지에 세워진 사액서원(임금이 편액, 서적, 토지 등을 하사한 서원)이었던 데다 만동묘(萬東廟)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낸 중국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임금 의종의 위패가 봉안된 만동묘는 우암의 제자인 권상하, 정호 등이 1703년에 창건했다. 그 이름은 화양동계곡 첨성대 암벽에 새겨진 선조의 친필 ‘萬折必東(만절필동)’에서 따왔다. ‘황하는 아무리 곡절이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의 이 말은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신하된 도리를 결코 그만둘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크게 고조돼 있던 터라, 만동묘를 끼고 있는 화양서원이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며 모두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다. 훗날 고종 때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불러왔을 정도로 그악스럽던 화양서원의 횡포는 오랫동안 지속됐다.



 

파락호 시절의 흥선대원군도 화양서원 앞에서 큰 봉변을 겪었다고 한다. 당시 만동묘에 들어가거나 그 앞을 지나가려면 누구나 초입의 하마소에서부터 걸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만동묘를 찾은 대원군이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무심코 하마소를 지나쳤다. 그러자 만동묘의 묘지기가 득달같이 달려나와서는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발길로 걷어차는 등 갖은 모욕을 주었다. 훗날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도적놈들의 소굴’이라며 철폐해버렸고, 뒤이어 다른 서원들까지도 문을 닫도록 명령했다. 그 뒤로 오랫동안 집터와 주춧돌만 남아 있던 옛 만동묘와 화양서원 터에 최근 여러 건물들이 복원됐다.

화양구곡에 얽힌 역사와 선인들의 흔적을 하나씩 더듬다 보면 약 5.5킬로미터에 이르는 화양동계곡의 종점에 당도한다. 역사의 흔적과 옛사람들의 자취가 또렷한 길을 지나온 탓인지 잠시 동안 세월을 거슬러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이래저래 선유동계곡에서 화양동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의 여운이 오래도록 스러지지 않는다.

글과 사진·양영훈(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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