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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안에는 오래된 마을이 있다. 성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한가롭고 예스럽다. 올망졸망한 초가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돌담, 고샅 깊숙한 곳까지 이어지는 돌담길, 뒤란과 앞마당의 손바닥만한 채마밭, 대나무로 엮어 만든 사립문, 나직한 처마 밑에 매달린 메주와 시래기 다발, 어디선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 마치 수백 년 세월을 삽시간에 거슬러 조선시대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하다.

낙안읍성민속마을은 여느 민속촌들과 같은 박제된 공간이 아니다. 지금도 80여 가구의 주민들이 대대손손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늘 활기가 넘쳐 때로는 번잡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토박이 주민들의 따뜻한 온정과 체취가 느껴지는 이 마을은 가슴 속에 깊이 묻어둔 고향처럼 아늑하고 정겹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낙안읍성(관리소 061-749-3347)에서는 성곽 자체보다도 그 안에 자리잡은 마을의 풍경과 정취가 외지 관광객들의 마음을 더 붙잡는다.

행정구역상 순천시 낙안면에 속하는 낙안읍성민속마을은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 등 세 마을로 이뤄져 있다. 마을 전체 규모는 비교적 큰 편인데도 걸어서 둘러보기에 아주 제격이다. 마을을 둘러싼 성곽 위로는 완벽한 순환형 산책로가 이어지고, 마을의 고샅길들은 막다르지 않고 뻥 뚫려 있어서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자분자분 쏘다니는 재미가 전라도 사투리로 ‘솔찬하다’.

더욱이 낮 시간에는 주·정차 금지구역으로 지정된 마을 안으로 자동차를 타고 들어갈 수 없어서 천상 두 발로 걸어다녀야 한다. 느긋하게 걸어도 3, 4시간이면 둘레 1410m의 성곽 길과 마을 고샅길을 샅샅이 둘러볼 수 있다.



천혜의 지형조건을 최대한 활용한 우리나라의 옛 성곽은 자연과 인간이 합심해 만든 역사유적이다. 그곳에서는 강물처럼 유구하게 흘러온 역사와 숱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대자연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성벽 위에 올라서면 아득한 옛날에 성을 쌓기 위해 그리고 성을 지키거나 빼앗기 위해 싸우다 숨져간 선인들의 함성이 바람결에 들려오는 듯하다. 때로는 까닭 모를 감동과 벅찬 희열이 선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낙안읍성의 성곽 길에서도 그런 소회와 감동을 몸소 느껴볼 수 있다.  

우리나라 옛 성곽의 90%가량은 산성이다. 외적과의 장기전에 대비해 쌓은 산성은 대개 시야가 훤히 트인 산꼭대기나 산중턱에 자리잡았다. 반면 왜구와 오랑캐의 침입이 잦은 남해안과 서해안 그리고 북쪽 변방에 주로 세워진 읍성은 평평한 들녘에 축조된 곳이 많다. 낙안읍성도 뒤쪽으로는 금전산(668m)이 우뚝하고, 앞쪽에는 넓고 기름진 낙안들녘이 시원스레 펼쳐진 곳에 위치한다. 대체로 읍성 안에는 관아와 민가가 함께 들어섰다. 유사시에 성문을 굳게 닫고 군사, 관리, 백성 등이 모두 하나로 뭉쳐 성을 방어하기 위함이다. 낙안읍성 안에도 객사, 동헌, 내아(內衙) 등 옛 관아건물과 수십 채 민가들이 밀집해 있다.

낙안읍성은 조선 태조6년(1397)에 처음 축조됐다고 한다. 당시 왜구들이 침입해오자 김빈길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은 뒤 왜구를 토벌했다는 것이다. 그 뒤로 조선 인조 때인 1626년 5월부터 1628년 3월까지 낙안군수를 역임한 임경업 장군이 지금과 같은 석성으로 개축했다고 한다. 그는 많은 선정을 베풀었는데,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정성스럽게 임경업 장군 추모제를 올리곤 한다.

현재 낙안읍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이 세워져 있다. 옛날에는 북문도 있었으나 호환(虎患)이 심해서 없앴다고 한다. 낙안읍성의 성곽 길을 한 바퀴 돌아보는 코스는 낙안읍성의 정문인 동문(낙풍루)을 출발해 서문, 남문(쌍청루)을 거쳐 다시 동문으로 돌아오는 것이 무난하다. 전체 길이는 짧지만, 북쪽과 남쪽의 성곽 길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객사와 동헌의 뒤편에 위치한 북쪽 성곽 길은 비교적 한산한 반면, 낙안읍성민속마을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남쪽 성곽 길은 늘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편이다. 또한 낙안에서 벌교까지 펼쳐진 낙안들녘을 바라보기에도 좋다.




낯선 이방인도 피붙이처럼 반겨주는 주민들
낙안읍성에서는 시야가 훤한 성곽 길을 걷는 재미도 좋지만, 미로처럼 이어진 골목길이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돌담에 박힌 돌 하나, 초가지붕 위로 올려진 짚 한 가닥에도 사람들의 각별한 정성과 오랜 손때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대부분인 주민들은 낯선 이방인들도 피붙이처럼 슬겁게 반겨준다. 또한 마을 곳곳에는 짚물공예, 목공예, 가야금 병창, 삼베 짜기, 농기구 만들기, 한지공예, 천연염색 등 전통문화 체험 공간이 마련돼 있어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직접 이용해볼 수 있다.

낙안읍성민속마을은 어쩌다 한 번쯤 큰맘 먹고 가볼 데가 아니다. 전통과 자연이 살아 있는 이 마을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계절마다 한 번씩은 찾아볼 만하다. 겨울날의 노루꼬리처럼 짧은 낮 동안에 주마간산 식으로 둘러봐서는 이 마을의 진면목을 엿보기 어렵다. 하룻밤쯤 머물면서 달빛 교교히 내려앉은 마을의 밤 풍경도 즐기고, 동트기를 알리는 수탉의 힘찬 횃소리도 들어봐야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낙안읍성민속마을이 고향처럼 마음 따뜻한 곳으로 기억되게 마련이다.      

낙안읍성에서 자동차로 30분 이내 거리에는 태고종의 종찰인 선암사,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로 유명한 벌교, 바다처럼 넓은 순천만 갈대밭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맘때쯤의 순천만 갈대밭에서는 ‘겨울철의 진객(珍客)’이라 불리는 흑두루미(천연기념물 제228호)의 우아한 자태를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순천만 갯벌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는 순천시 별량면 화포마을과 순천시 해룡면 와온마을은 각각 해돋이와 해넘이의 명소로 유명하다. 

 글·사진 양영훈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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