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2008년 한국 야구는 전인미답의 신기원을 이뤄냈다. 김경문 감독이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베이징올림픽에서 9전 전승의 신화를 작성하며 금메달을 따낸 것. 그는 올림픽 사상 가장 극적이자 뜻깊은 금메달이라는 칭송 속에 금의환향했다.
한편 올림픽에서 한국에 2연패하며 노메달 수모를 당한 일본은 ‘한국 타도’를 외치며 이듬해 열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서둘러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일찌감치 요미우리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며 설욕을 노렸다.
그러자 한국도 준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역시 최대 관심사는 WBC 사령탑 선임이었다. 누가 지휘봉을 잡느냐에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상한 기류가 감지됐다. 이미 김경문 올림픽팀 감독은 WBC 대표팀 지휘봉을 잡지 않겠다며 여러 차례 고사한 상황. 하지만 한국야구위원회(KBO)는 김 감독이 WBC까지 맡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 KBO에 국제대회 사령탑 선임권이 넘어오면서 감독 선발 기준에 대한 큰 원칙이 세워졌다. 한국시리즈 우승팀 감독이 지휘봉을 잡아야 된다는 것. 그러나 두 번이나 그 원칙이 깨졌다.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감독 0순위는 선동열 삼성 감독이었으나 김재박 감독이 강한 의욕을 드러내면서 후배인 선 감독이 양보했다.
또 2007년 3월 베이징올림픽 예선을 앞두고도 한국시리즈 2연패를 달성한 선 감독이 다시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으나 “아직 대표팀을 맡기엔 젊다”고 고사해 김경문 감독에게 지휘봉이 넘어갔다.
사실 금메달을 따낸 김경문 감독으로선 WBC까지 맡기에는 부담이 컸다. 스스로 “대표팀 때문에 소속팀인 두산을 돌볼 여력이 없다”고도 했다. 1년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스프링캠프 기간 동안 사령탑이 자리를 비우면 시즌 준비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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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이 이처럼 확고한 의사를 보이자 KBO는 한 발 물러서야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2007, 2008년 한국시리즈를 2연패한 SK 김성근 감독이 후보가 돼야 했다. 그럼에도 KBO는 김성근 카드를 주저했다. 그러자 KBO가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피어오르게 된다.
언론 보도가 잇따르는 등 사령탑 선임 문제가 이슈화하자 윤동균 KBO 기술위원장이 2008년 11월 4일 김성근 감독을 만나 부임을 요청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건강 문제로 고사했고, KBO는 곧바로 다음 날 김인식 한화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한다고 발표했다.
당시는 KBO가 김인식 감독에게 허락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이후 하일성 당시 KBO 사무총장이 김인식 감독에게 지휘봉을 잡아달라고 설득했고, 결국 김인식 감독이 이를 수용했다. 모양새는 KBO가 김성근 감독에게 먼저 감독직 수락을 요청했지만 김성근 감독이 고사하자 김인식 감독을 선임한 것이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김인식 감독 선임 발표일에 하 사무총장이 김성근 감독을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대목이다. 이 자리에서 김성근 감독에게 대표팀 감독 부임을 다시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돌연 하 총장은 김성근 감독과의 만남을 취소하고 곧장 김인식 감독 선임을 발표했다.
통상 대표팀 사령탑을 선임할 때는 소속팀과 논의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에 처음에 고사하더라도 재차 설득하는 과정이 따른다. 이에 대해 하 총장은 “김성근 감독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데 어렵지 않겠나. 그래서 다른 대안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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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의문은 김성근 감독이 왜 지휘봉을 덥석 받지 않았냐는 것이다. 재일교포 출신인 김성근 감독은 그간 대표팀 감독직에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보여왔다. 야구계의 ‘비주류’로 한 번도 대표팀을 맡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건강 문제를 이유로 든 것도 석연치 않았다. 일각에서는 김성근 감독이 WBC 대회에서 대표팀이 좋지 못한 성적을 내고 이에 따른 이미지 훼손을 우려해 고사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김성근 감독은 대표팀 사령탑 선임 직후 기자에게 속내를 밝힌 적이 있다. 그는 “KBO는 나에게 맡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라도 낌새를 알 수 있었다. 당사자들이 나를 싫어하는데 어떻게 내가 하겠다고 나설 수 있겠나. 그래서 첫 만남(윤동균)에선 일단 고사를 했지만 재요청을 하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고 털어놨다. 변명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그는 “진심”이라고 했다.
부임 요청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에 대한 예우 논란도 불거졌다. 대개 기술위원장이 먼저 만나 운을 떼고 사무총장이 다시 만나 확정하는 게 순서. 그런데 사무총장은 만남을 철회했고, 곧바로 김인식 카드를 꺼내들었다. 원로 감독으로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성근 감독으로선 지휘봉을 맡더라도 대표팀 행정지원 주체인 KBO와 부딪칠 수 있다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 때문에 감독직을 포기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었다.
원래 KBO와 김성근 감독은 불편한 관계였다. 김성근 감독과 KBO는 끊임없이 충돌해왔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KBO의 준비 소홀과 원칙 없는 행정 등에 대해 자주 쓴소리를 해왔다. 이 때문에 KBO의 정책 집행을 지휘하는 하 총장으로서는 난감했을 수도 있다.
하 총장은 KBS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김성근 감독과 친분을 나눴다. 사석에선 김성근 감독을 ‘형님’으로 불렀고 “내게 투수 이론을 가르쳐준 스승은 김성근 감독”이라며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소원해졌고 하 총장이 KBO 행정 수장이 되면서 정면으로 맞섰다.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졌다.
이제 한 해가 지난 시점. 김성근 감독은 여전히 KBO 행정에 원칙이 없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감독 문제로 홍역을 치른 KBO는 다음 WBC에도 전년도 한국시리즈 우승팀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맡기로 결정했다. 김성근 감독이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경우, 3회 WBC 대표팀 지휘봉을 잡을 수 있다. 단, 그때까지 감독으로 재임할 수 있다면 말이다.
글·이선호 OSEN 야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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