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생각지도 못했던 ‘마흔 살 현역 선수’. 뒤돌아보면 그에게 야구는 인생과도 같다. 이종범은 “젊었을 때 무서울 것 없다가 처절하게 좌절도 맛보면서 뭔가를 알게 됐지만, 한편으론 은퇴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꼭 인생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종범은 마흔을 맞으면서 ‘새로운 시작, 그래서 절박함’을 외친다. 개인 통산 2천 안타(한일 통산)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은퇴해도 여한이 없지만 새삼 야구의 맛을 알게 된 마당에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절실해요. 젊어서는 놀면서 해도 기회가 많았는데 지금은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젠 하루를 한 달처럼 살아야 버틸 수 있습니다. 나이 들면서 여유도 생겼지만 적잖게 긴장도 하고 살아요.”
말뿐이 아니다. 그는 지난겨울 일본 미야자키 전지훈련을 ‘독하게’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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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껏 훈련하고 잠시 쉬면서 땀을 닦으면 어린 선수들이 ‘지치지 않으세요?’라고 물어요. 그런데 지친다고 말은 못 하겠더라고요. ‘저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생각도 들고, 나스스로에게 한 약속도 있어 내색하지 못하고 견뎌냈죠.”
이런 모습에 주변에선 그가 회춘했다고 난리다. 광주일고 후배인 최희섭은 “선배님이 스윙하고 수비하는 걸 보면 나이를거꾸로 먹는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황병일 수석코치도 “이종범이 팔팔하기에 하루는 ‘어째 마흔이 아니라 서른아홉이 된 것 같다’고 했더니 씩 웃더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불혹’ 이종범을 독하게 몰아세운 건 무엇일까. 그는 “잊었던 기본자세, 특히 폼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종범은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로 참가해 맹활약했다. ‘역시 이종범’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정작 시즌이 개막되자 내리막길을 탔다. 2006시즌 타율이 0.242로 떨어지더니 2007년에는 0.174로 급락했다. 그때 ‘이종범 야구는 이제 끝났다’는 게 대세였다. 그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
그 이유는 폼, 특히 지나친 상체 위주의 스윙이었다. 이종범은 “하체는 안 쓰고 상체는 딱딱하게 돌렸다. 몸쪽 공, 변화구, 높은 공에 전혀 대응이 안 됐다”고 회상했다. ‘편하게’ 야구하려는 무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프로 데뷔 때부터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하기 전까지는 하체를 단단하게 받쳐놓고 공을 때렸다.
“상체 위주의 스윙은 단기전에서는 어느 정도 통해요. 1회 WBC 때는 집중력으로 잘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1백30경기 정도를 치러야 하는 정규 시즌에선 그런 폼이 반드시 탈이 나고, 한번 익숙해지면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편안해지기 위해 시도했던 상체 위주의 스윙. 과거의 이름값에 기댄 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했다. 타격이면 타격, 수비면 수비, 여기에 만점 센스까지 쫓아올 자가 없었다. 그래서 ‘천재’라고 불렸고 스스로도 오로지 맨 윗자리에 선 자신만 보였다.
“잘나갈 때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야구를 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도루 한번 해야지’라고 생각하면 다음 날 도루를 했고, ‘만루 홈런 한 방 쳐야지’라고 생각하면 만루 홈런이 쳐지더라고요. 정말 못 칠 공이 없었어요. 모든 게 생각대로 됐죠.”
이랬던 그가 2008년 초 은퇴설에 휘말릴 정도로 추락했으니 그 절망감이 오죽했을까.
“내 스윙이 이 정도로 망가졌나 하는 자괴감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시즌 중이라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황이니 너무 괴로웠어요.”
‘은퇴 시점은 나 아닌 누구도 결정할 수 없다’는 발언으로 우여곡절 끝에 은퇴설을 잠재운 그는 2008시즌을 앞둔 전지훈련에서 두 달가량 밤늦게까지 스윙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 퇴화한 하체 근육을 복구하기 위해 지독하게 근력운동도 했다. 노력은 주효해서 2008년 0.284의 타율로 살아났고, 지난해에도 타율 0.273의 좋은 성적을 냈다. 올해도 출발이 좋다. 시범경기에서 쾌조의 타격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 더구나 올시즌엔 한일 통산 2천 안타(한국 1천6백67개, 일본 2백86개) 달성이라는 목표가 생겨 타석마다 집중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개인기록 달성 욕심보다는 팀이 우선이다.
“과거 잘나갔을 때도 ‘팀이 잘돼야 나도 빛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막연한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에는 팀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느낌을 아주 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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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은 희생하기가 쉽지 않다. 타구를 의식적으로 밀어쳐서 내야 땅볼을 치면 진루는 성공시켜도 본인의 타율은 떨어진다. 출장 기회에 연연하는 노장들은 그래서 희생타보다는 무리하게 쳐서라도 안타를 뽑아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르다.
“젊은 선수들하고 맞부딪쳐 싸워야 하는데 당장 희생만 할 수는 없죠. 정말 늙은 선수가 땅볼 치고 물러나면 팬들은 야유를 보내요. 그렇지만 야구를 하는 사람은 알아요. 내가 왜 밀어쳐서 내야 땅볼을 만드는지를.”
이처럼 마흔에 야구를 알기 시작했다지만 이젠 은퇴를 염두에 둬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종범은 “팬들, 그리고 나 스스로도 느끼는 때가 은퇴 시기”라고 말했다. 그래도 현역으로 뛰는 마지막 순간까지 팬들을 위해서라도 진지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제 또래 40대 중년 팬들이 같은 처지라고 보실 것 같아요. 40대 인생이라는 게 때로는 비굴함, 서글픔을 느낄 때가 많잖아요. 그럴 때 제가 경기장에서 땀을 흘리며 뛰는 모습을 보시고 ‘그래 다시 한 번 뛰어보자, 쉽진 않지만 달려보자’고 기운을 얻으셨으면 해요.”
글·윤승옥(스포츠서울 야구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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