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2009년 4월 충남 태안군 마도 앞바다에서 8백 년 동안 잠자고 있던 고려 선박 ‘마도선’이 깨어났다. 그동안 발굴된 난파선처럼 여기서도 수많은 고려자기와 도기가 쏟아져 나왔다. 마도에서 발견된 고려자기는 2003년 전북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 해저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이 배도 청자 운반선이었을까? 강진의 가마에서 만들어진 청자를 싣고 가다가 파도를 만나 침몰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기존에 발굴된 청자 운반선들과는 달리 마도선에서는 마치 바닷속에 풍년이 든 것처럼 볍씨, 메밀, 조, 콩 따위의 곡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젓갈, 말린 가오리, 석탄 등이 발굴되면서 마도선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팀은 마도선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사이드스캔소나(Side Scan Sonar·수중에서 초음파를 이용해 옆쪽을 확인하는 기기), 멀티빔과 같은 최첨단 기기를 동원해 수개월 동안 바닷속을 뒤지고 또 뒤졌다.
고려 무신정권 시대 최충헌 집권 시기의 실존인물로 <고려사>에 나오는 대장군 김순영에 관한 죽간(竹簡·대나무에 기록한 화물표)이 발견되면서 탐사는 활기를 띠었다. 목간은 여러 차례 출토된 적이 있지만 죽간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탄소연대측정 결과 이 배는 1200년에서 125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드러났고, 김순영의 기록을 바탕으로 최종적으로 1208년에 출항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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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팀은 마도 1구역에서 발견됐다고 해서 마도 1호선이라 이름 짓고, 청자 운반선이 아니라 조운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운선이 발굴된 것은 처음이었다. 조운선이란 조세를 운반하는 선박이다. <고려사>를 보면 매년 가을 추수가 끝난 뒤 곡물을 거둬 조창에 모아두었다가 다음 해 2월부터 5월 사이에 개경으로 보냈다고 돼 있다.
마도 1호선이 발견된 곳은 옛날부터 물길이 험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고려시대는 배가 다니기 어렵다고 난행양(難行洋)으로 불렸고,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60년 동안 1백 척 이상의 배가 좌초되고 사람은 천명 이상, 곡식은 만오천 석 이상 잃었다? 2009/12/23 공감고 나온다. 그럼 마도 1호선도 험한 물살에 휩쓸려 가라앉은 것일까? 배에 실려 있던 물품들과 선체가 그대로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난파하거나 폭풍을 만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마도 1호선의 비밀은 아직도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마도 1구역에서 동쪽으로 9백 미터 떨어진 마도 2구역. 2009년 7월 마도 2구역에서는 엄청난 크기의 닻돌(배가 정박할 때 닻을 물속에 가라앉히기 위해 매단 돌)이 발견됐다. 닻돌의 크기는 가로 1백72센티미터, 세로 77센티미터나 됐다. 여기서 이런 닻돌이 11개나 발견됐다. 보통 배 한 척당 한두 개의 닻돌을 두기 때문에 침몰한 배가 적어도 5, 6척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고려시대 서해안은 고려뿐 아니라 중국 송나라와 일본을 연결하는 중심항로이기도 했다. 마도 발굴에서 나온 ‘강(綱)’자가 새겨져 있는 송나라 묵서자기는 일본에서도 발견된다. 강은 중국 상인의 성(姓)으로 자신의 물건에 표시를 한 것이다. 당시 북송과 남송은 거란과 여진에 막혀 육로가 끊김으로써 수로를 통해 교역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중심에 고려가 있었다.
해상무역의 3요소는 상인, 자본, 기술이다. 그중에서도 기술은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이 없으면 무역은 일차적인 재료 거래에 한정되기 때문에 생산지가 제한될 수밖에 없고, 그 교역로를 독점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무역상품에서 기술 비중이 높아지고 문화상품이 많아지면 장소에 대한 집착이 줄어든다. 당시 동아시아는 하이테크놀로지 기술이 집약된 뛰어난 교역물품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양의 지중해처럼 교역로를 독점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고려는 중국에서 청자 기술을 배웠지만 아름다운 비색과 상감기법을 창조해 독자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고려청자는 지금으로 치면 하이테크놀로지 기술이 담긴 문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세계에 여러 종류의 청자가 있지만 고려청자만큼 우아한 청자는 없기 때문이다.
고려청자뿐 아니라 고려의 기술력은 당대 최고였다. 고려와 송나라의 교역이 늘어나자 시인 소동파는 화려한 고려의 물품이 너무 많이 들어와 백성들의 혈세만 늘어난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고려인의 솜씨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일본은 끊임없이 대장경을 탐냈고, 지금도 대장경을 필사하는 일본인들이 적지 않다.
고려는 물류의 허브 역할을 하며 송나라와 함께 동아시아의 항해 시대를 이끌었다. 약탈과 침략으로 붉게 물들었던 지중해와는 달리 동아시아 바다는 평화로웠다.
바다를 육지의 끝이 아닌 또 다른 육지의 시작으로 보았던 고려는 평화적인 시 루트(Sea Route)를 통해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했다. 사신을 통한 공무역뿐 아니라 상인을 통한 사무역 역시 한반도 역사상 가장 활기를 띠었다. 매년 겨울철에 열린 팔관회에는 중국, 일본은 물론 멀리 동남아시아와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 대거 개경으로 몰려와 서로의 문화 콘텐츠를 교환하는 국제적인 축제를 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동아시아 바다가 평화의 바다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동양이 이룩해낸 고도의 정신세계이자 21세기 글로벌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화합과 공존의 메시지다. 그렇기 때문에 마도에서 다시 만난 고려는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글·이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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