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새로운 세계에 도달할 듯 기대감에 부풀었다가 다시 심연에 빠지기도 한다. 그 심연을 지나면 평화가 있을까. ‘페인티드 베일’은 기대와 심연을 오가며 서로를 발견한 부부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다.
1920년대 중국은 급격한 산업화 과정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섬유공장은 외국인 소유였고 노동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반외세 운동과 파업이 잇달았고 영국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십 명의 시위자들이 사망했다. 그래서 영국에 대한 중국인의 반감이 높아가는 1925년 중국이 영화의 배경이다.
상하이에서 근무하는 영국인 세균학자 페인은 런던 체류 중 한 파티장에서 키티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키티는 결혼을 독촉하는 어머니에게 떠밀리고 페인의 열정에 흔들려 함께 중국으로 건너온다. 페인을 잘 알지 못한 채 성급히 결혼한 키티는 과묵한 남편과 잘 지내지 못한다. 외로움에 빠진 키티는 사교적인 찰리의 유혹에 빠져 외도를 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페인은 키티를 데리고 콜레라가 창궐한 위험지역으로 자원해서 진료를 떠난다.
상처받은 페인은 냉정한 얼굴로 일에만 열중하고 키티는 무료함에 지친다. 프랑스 수녀원 원장의 초대를 받고 수녀원에 갔던 키티는 수녀들이 존경하는 남편의 모습에서 자신이 몰랐던 면모를 발견하고 남편에 대한 두려움을 걷어내고 다가선다. 페인 역시 아이들과 어울리는 키티의 천진한 모습을 보며 마음이 누그러진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새로운 위험 속에 빠져 있다. 프랑스 원장 수녀는 키티에게 사랑과 의무가 하나되는 것은 축복된 일이라고 말했다. 키티에게 남겨진 축복된 시간은 아쉬움과 회한으로 가득하다.
영화는 소설의 내면 묘사보다 극적 구성에 치중한다. 1925년 중국의 역사적 배경으로 긴박감을 고조시킨다. 그렇다 해도 콜레라를 퇴치하기 위해 기지와 용기를 보여주는 영웅적인 페인과, 미신에 빠진 중국인들의 비합리성과 군중의 폭력성을 과도하게 대비시키는 것은 서구인들의 오만한 오리엔탈리즘으로 의심받을 만하다.
영화 ‘페인티드 베일’이 부부의 사랑과 화해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소설 <인생의 베일, Painted Veil>(민음사, 2007년)은 키티의 내면 묘사와 인간적인 성숙이 더 강조되어 있다. 서머싯 몸은 이탈리아에서 스무 살 때 <신곡>을 읽으며 연옥편에 나오는 망령 피아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남편에게 부정을 의심받아 살해되었던 피아는 단테에게 현세로 돌아가거든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간청한다. 피아의 슬픈 호소는 서머싯 몸의 상상력을 자극했지만 걸맞은 배경을 찾지 못했다. 서구 지식인들의 중국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던 1920년 중국에 다녀 온 후 그는 이 이야기를 착안하게 되었다.
51세에 <인생의 베일>(1925년)을 출판한 서머싯 몸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주제였기 때문에 키티란 여성을 통해 인간의 애증과 성숙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키티는 런던에서는 매력과 외모로 지위와 수입이 만족스러운 신랑감을 찾던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장대한 나라에서 고난을 겪으며 자연 속에서 치유되고 성장한다. 콜레라로 인한 공포와 절망의 무대 한복판에서 살아 있는 마당에 자신같이 어리석었던 여자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해서 인간적 깊이를 가진 남편이 괴로워 한다는 건 부질없다고 깨닫는다. 그래서 남편이 지나친 자의식의 동굴과 자존심의 상처로부터 빠져나와 덜 불행하기를 바란다. 키티는 남편과 자신의 심연을 통해 인간의 모순과 한계를 수용하게 된다. 소설의 끝, 키티는 평화로 이어지는 길로 떠날 수 있다.
정혜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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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