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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대학생들, 대한민국을 다시 보다> 출간



 

“토론을 하면서 놀랐던 것은 나 자신은 좌파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좌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좌파의 이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좌파가 아니라 북한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그동안 배워왔던 역사가 북한에서 주장하는 역사의 흐름과 동일하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2008년 가을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의 ‘발전사회학’ 강의에 참여한 연세대 경영학과 강의철 학생은 학기말 리포트에 이렇게 적었다. 법학과 박정헌 학생은 강의를 수강한 뒤 자신의 이념 지향이 바뀌었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필자는 스스로를 좌파로 생각해왔다. 이는 IMF체제 당시 필자의 가정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이 결정적이었고, 경제위기를 극복한 이후 노무현 정권 초기까지 표출됐던 사회 갈등에서 진보 담론이 실천한 몇몇 운동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수업을 듣고 난 후 필자의 정체성은 중도 우파 정도에 있는 듯하다. 이는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변화한 것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필자는 중도 우파였다고 생각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의 대표적 보수학자 중 한 사람인 류 교수가 강의를 개설한 2008년 가을은 광우병 촛불시위가 한바탕 대한민국을 휩쓸고 난 직후였다. 류 교수는 한국 현대사를 직시하는 강의를 개설하고 한 학기 동안 학생들과 ‘논전(論戰)’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진정 대한민국의 역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인가. 이승만은 단독정부를 수립해 한반도의 분단을 초래한 독재자인가. 박정희는 권력욕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인권을 탄압한 독재의 화신인가. 재벌은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을 통해 한국경제의 양극화를 가져온 주범일 뿐인가.

이 같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쟁점에 대해 류 교수와 강의에 참여한 43명의 학생들은 매주 열띤 논쟁을 벌였다. 학생들은 10명씩 4개 조로 나눠 매주 일요일 밤 10시부터 월요일 새벽 1시까지 교내 인터넷망에서 토론 주제에 대해 ‘사이버 토론’을 하고, 이를 정리해 강의실에서 발표와 토론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사이버 토론에서 각 조별로 매주 2백 개의 글을 쓰며 논쟁댓글을 올렸다. 한 학생당 매주 약 20개의 글을 쓴 셈이다. 류 교수는 매주 올라온 8백 개의 글을 읽고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다시 맞붙었다. 주요 텍스트는 고(故)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의 <건국과 부국>,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의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 신장섭·장하준 교수의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등이었다.

처음에는 논쟁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북한과 남한은 체제가 다른데 어떻게 비교하느냐”고 따지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면 다른 학생들이 나서 “똑같은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남한과 북한이 왜 달라졌는지 비교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류 교수는 “의견을 발표할 때는 반드시 ‘사실(Fact)’에 입각해 근거를 댈 것”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객관적인 자료와 문헌을 찾아 읽었다.
 

최근 출간된 <대학생들, 대한민국을 다시 보다>(북마크)는 16주간 펼쳐진 이 같은 ‘전쟁’의 결과물이다. 강의에 참여한 학생 중 15명의 학기말 리포트를 담았다. 전문 연구자의 논리 정연한 논문은 아니지만, 오늘 대한민국을 사는 20대 대학생들의 대한민국관(觀)이 그대로 드러나는 충실한 보고서인 셈이다.

지난 4월 13일 연세대에서 필자로 참여한 학생들을 만났을 때 이들이 생각한 대한민국관을 들을 수 있었다. 국문학과 한영익 학생은 “고등학교 때 배운 상식과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만으로 한국 현대사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오다가 ‘아, 그렇게 단순히 이야기할 것은 아니구나’ 하고 깨달은 것이 큰 수확”이라고 했다. 사회학과 이근평 학생은 “보수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왔지만 주위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기를 꺼렸다. 이제는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책에서 학생들은 평소 자신이 가졌던 의견과 수업을 들으며 느낀 경험을 진솔하게 썼다. 한영익 학생은 “이승만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자본주의 질서를 최초로 선택한 점에서 박정희보다 한국의 현대사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썼다. 국문학과 박인용 학생은 “유신체제 아래 중화학공업과 조선에 대한 투자가 성공함에 따라 한국은 향후 수십 년에 이르는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적었다.

재벌의 공과(功過)에 대해서도 균형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갖게 됐다. 사회학과 김근홍 학생은 “재벌에 대한 국가의 특혜가 분명 존재했지만 이 특혜는 특혜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발전을 위한 것이었으며, 재벌은 국가의 특혜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에 시달려야만 했다”고 썼다.

류석춘 교수는 “인터넷과 강의실 토론을 통해 대한민국 현대사를 객관적으로 보는 강의를 진행하는 모험을 처음으로 실행했다”며 “학생들이 누구의 언어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진지하고 도전적으로 들려줘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글·이한수(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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