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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묵 하면 묵사발이나 묵무침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묵물국도 별미 중의 별미다. 묵물국은 무엇일까. 묵에 물을 넣고 끓인 국. 아니다.

정월 설이 지나면 겨우내 먹은 음식이 싫어지고 뭔가 다른 음식이 궁금해진다. 우물물에 손을 담그면 손이 새빨갛다 못해 퍼렇게 보일 정도로 추운 정월인데 할머니는 항아리 속에 보관해 두셨던 녹두를 꺼내 녹두 전분을 만드실 준비를 하신 기억이 난다. 물속에 타고 갠 녹두를 불려 맷돌에 곱게 간 후 이를 고운 모시 보에 거르고 주물러 짠물을 갈아준 뒤 전분을 가라앉히고 윗물을 따라 버린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하면서 하얀 전분을 얻고 이를 건조시켜 빻은 것이 녹두 전분이다.

이런 전분을 한지 봉지에 넣어 두고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을 접대할 일이 있을 때 꺼내 찬물에 넣고 휘저어 잡물을 없앤 후 서서히 전분 풀을 쑤다가 충분히 뜸을 들여 되직해지면 그릇에 넣어 굳힌 것이 청포묵이다. 청포묵은 담백하고 미끌거림이 감칠맛을 내지만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쉬운 음식은 아니다. 묵 요리는 예나 지금이나 꾸준히 식탁 위에 오르는 음식으로, 이 묵 중에 최고가 녹두 전분을 이용해 만든 청포묵이다.

그런데 이런 청포묵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가 자칫 모르고 지나가버릴 우리나라 조리법의 숨겨진 과학이 있다. 그저 할머니가 “정월에 해야 한 됫박이 더 나온다”는 말씀의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녹두는 온도가 올라가면 싹이 트기 위한 성분 변화가 진행된다고 한다. 그런 녹두로 전분을 만들면 삭게 되어 위로 부유(浮游)하면서 가라앉는 전분 양이 적어지게 된다. 따라서 봄에 나뭇잎이 싹트기 전 추운 정월에 전분을 만들어야 같은 녹두를 가지고도 더 많은 녹두 전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녹두를 갈아 물에 담아두게 되면 밑에는 전분이 가라앉지만 윗물에는 녹두의 단백질 성분들이 수용성 상태로 녹아 있게 된다.

우리 할머니들은 녹두 전분뿐만 아니라 녹두 간 물, 즉 묵물을 받아두었다가 새우젓을 풀어 국을 끓였으니 여기에도 조리의 과학과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단백질이 염(새우젓의 소금)과 열에 의해 응고되면서 뽀얀 뭉게구름 형태로 익어 올라오는데 이 순간에 불을 꺼야 한다. 만약 이 순간을 지나치면 단백질 응고물이 순식간에 확 풀어지면서 국이 탁하게 변한다. 그러므로 국이 끓기를 정성스레 지켜보다가 때가 되면 불을 끄고 조심스레 한 국자씩 국 대접에 떠 담으면 국물 속에 흰 덩이 구름이 떠 있는 듯 아름답고 맑은 국이 만들어진다.

[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짭조름하고 담백한 묵물국에 정월의 시큼한 묵은 김치도 한몫을 한다. 가히 시(時)와 절(節)을 알고 그 맛과 멋을 음식을 통해 이용했으니 우리의 식생활의 지혜를 어찌 식치(食治)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도 정월이 지나고 어스름 오후녘이 되면 항아리 모양의 파란 법랑그릇을 들고 묵집으로 묵물 사러 가던 어릴 적 내 모습이 생각난다.

이때 아니면 못 먹는 음식이라 생각되어 매년 김장김치 떨어질 무렵이면 녹두를 타서 녹두 전분도 만들고 묵물국도 만들어 먹었더니만 외국에 있는 큰딸애가 어느새 입맛에 뱄는지 어제는 전화로 묵물국 이야기를 한다. 이게 이야기가 있는 우리 가족의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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