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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너무 힘들 땐 아이들 자는 얼굴 봤죠




김화주씨는 처음에는 “살아온 얘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에 “다들 그런 것처럼 열심히 살아온 것밖에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4남매, 손자 손녀와 함께 찍은 단란한 가족사진 앞에 서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남편은 1969년, 훈련 중에 순직했어요. 큰딸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예요. 3학년, 1학년, 그리고 젖먹이. 그렇게 넷과 저만 남았어요. 지금도 여자 혼자 아이 키우는 일이 힘들지만, 그때는 더 그랬죠. 그래도 마침 일을 주겠다는 분이 있었어요. 시내버스 회사였는데, ‘입금원 일을 해보겠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하겠다고, 뭐든 할수 있다고 했어요.”

당장 아이들 밥줄 돈이 없어 일을 시작해야 했지만 뜻밖의 암초에 부딪혔다. 재정보증인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저는 무남독녀예요. 시아버지는 아이들 아빠만 데리고 월남했고요. 가진 것 하나도 없고 딸린 자식만 4명인데 누가 제 재정보증인으로 선뜻 나설까요.” 굶는 것도 힘들었고 도움을 구하려 고개를 숙이는 일도 낯설었지만 희망이 없다는 사실만큼 김화주씨를 좌절케 한 일은 없었다.




“이대로 산다면 과연 좋은 날이 오기는 할까. 엄마가 힘들까봐 배고프다는 말도 못하는 아이들을 보니 되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미안하고, 막막하고. 단지 힘들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김화주씨는 약국으로 가서 수면제를 사들고 아이들과 손잡고 한강 어귀에 섰다.

“큰딸에게 물었어요. ‘그냥 우리 여기서 죽어도 괜찮지 않을까?’

딸이 울면서 그러더군요. ‘엄마! 아빠만 살아 있었다면 엄마가 이렇게 힘들지 않았겠지? 아빠 만나러 가자.’ 결심을 굳히고 나서도 한참을 우는데 셋째 딸이 조용히 제 손을 끌어 잡았어요.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게. 법관이 돼서 엄마같이 어려운 사람없게 할 테니 죽지 말자.’ 집으로 돌아와 잠든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쓸면서 남편을 생각했죠. 그리고 해가 뜰 무렵 다시 마음을 다잡았어요.”

단숨에 가장 힘들었던 시절 이야기를 내뱉은 김화주씨는 한참동안 침묵했다. “회사에는 격일로 나갔어요. 남은 날에는 보따리를 머리에 지고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잠자는 시간도 거의 없었어요.”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 살던 시절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못하겠다 생각이 드는 날이면 자는 아이들 얼굴을 한참 쳐다봤어요. 우리 부부가 남긴 증거가 아이들이었죠. 아이들이 크면 저와 남편이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걸 이해해줄 거라 믿었어요. 일찍 거둔 남편의 목숨은 다른 사람, 우리나라를 위해 쓰인 것이라는 점도요.”

4남매는 김화주씨 삶의 원동력이자 기쁨이었다. 올해 54세인 큰딸 원춘남씨는 미국 휴스턴에서 요리공부를 했고, 지금은 싱가포르에서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둘째딸 경란씨는 바이올리니스트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음대를 졸업한 경란씨는 셋째딸 혜욱씨와 성격이 딴판이라고 한다.




경란씨가 여성스럽다면 인하대 법학 교수로 있는 혜욱씨는 털털한 편인데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재원이다. 막내아들 승호씨도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공부했다. 남부러울 것 없이 훌륭하게 자랐지만 김화주씨가 ‘장한어머니’가 된 건 이 때문만은 아니다.

“사위들도 가끔 저더러 ‘엄마’라고 불러요. 다같이 모인 자리마다 저절로 흐뭇해지는 건 아이들이 정말 착하게 자라줬기 때문이에요. 저보다 남을 생각할 줄 알고 형제간 우애를 소중히 해요. 한 달에 한 번은 저를 찾아와 말동무도 해주고요. 진짜 ‘가족’을 키워냈다는 게 행복해요.”

김화주씨의 네 자녀는 아버지가 순직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애국을 실천하는데도 주저하지 않는다. 외국에서 공부할 때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를 알리고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아이들 얘기에 미소가 떠나지 않던 김화주씨의 표정이 다시 흐려졌다. “제가 아이들 키우며 먹고 사느라 힘들던 와중에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가 그리워요. 그래서 저는 미망인회의 저보다 나이 많은 분들을 어머니라고 불러요. 친정어머니에게 잘해드리지 못해 새로운 어머니들을 보살피려 노력해요. 혼자 사는 노인분들 찾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국가보훈처는 김화주씨에게 상을 주며 ‘남편을 조국에 바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남다른 열정과 헌신으로 자녀를 훌륭히 성장시킨 공로를 인정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화주씨의 봉사정신을 높이 사며 타의 귀감이 된다고 알렸다.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부디 하늘에 있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건강하게 사는 거예요. 그래야 어머니(미망인)들을 모시고 제가 지금 누리는 행복을 나눌 수 있으니까요.” 김화주씨는 6월 20일 늘 그래왔듯 다른 전몰군경 미망인들과 함께 연고 없는 국군용사들의 묘지를 참배할 예정이다.

글·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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