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아버지는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가난한 홀어머니는 여섯 남매를 키워야 했다. 고향(전남 장성)에서는 먹고살기가 어려워 초등학교 때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왔다. 도봉동 판잣집에서 살면서 초등학교를 겨우 나온 소년은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열여섯 살 때 소년은 삼촌의 소개로 동네 일식집에 취직했다. 주방보조 자리였다. ‘음식점에서 일하게 됐으니 배는 곯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연탄 1백50장을 하루에 두 번씩 갈고, 밤늦게까지 온갖 허드렛일을 했다. 월급 2만5천원을 받던 시절에 매달 2만4천원씩 적금을 부었다. 사장이나 손님들이 쥐여주는 돈도 꼬박꼬박 적금했다.
주방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언젠가 독립하게 될 날을 염두에 두고 고객관리를 시작했다. 식당에 오는 손님들의 신상명세를 작성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정성껏 만든 음식을 직접 배달했다. 그렇게 5천여 명을 관리했다. 스물다섯 무렵 그는 일식업계에서 알아주는 주방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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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이 되던 1993년, 그에게 기회가 왔다. 손님이 없어 고전하던 한 일식집 사장이 그를 주방장으로 스카우트했다가 아예 가게를 넘기겠다고 제의했다.
“제가 관리하던 5천여명의 고객들에게 음식점을 냈다고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문을 연 첫 달에 그 중 절반가량이 다녀갔을 겁니다. 6개월 만에 보증금 1억원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꾸준한 사회봉사활동을 인정받아 지난 7월 15일 국민 포장을 받은 배정철(48) ‘어도’ 사장이다.
배정철 사장이 ‘나누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께서 어려운 살림 가운데서도 이웃에 크고 작은 도움을 주는 것을 보면서 ‘작은 것이라도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주방장 생활을 할 때부터 배 사장은 손님 한 사람당 1천원씩 기부한다는 생각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첫해에 3천여만 원이 모였다. 이 돈을 단골손님인 김석화 서울의대 교수의 소개로 함춘후원회에 기부했다. 함춘후원회는 선천성 얼굴 기형아들의 수술비를 후원해 주는 단체다. 지금까지 함춘후원회에 기부한 돈은 10억여 원, 그로 인해 혜택을 본 환자는 3백85명에 달한다.
2007년부터는 매년 두 차례 서울대 연건동병원과 분당병원에서 초밥바자회를 열고 있다. 이렇게 해서 모이는 2천여만 원은 전액 병원에 기부한다. 작년부터는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도 초밥바자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 외에 가톨릭의대·순천향의대에도 매년 2천만원을 기부하고 있다.
2008년부터는 고향인 전남 장성의 장성고·삼계고, 친구가 교사로 있는 전남 순천 순천고, 어도 인근에 있는 서울 영동고에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다. 이렇게 나가는 돈이 매년 6천만원.
그 밖에 장애인시설·요양원 등에 매주 쌀과 생선을 보내고, 논현동·신사동 일대 노인들에게 매달 한 번씩 무료로 음식을 대접한다. 고향 마을의 노인들에게도 매년 한차례씩 음식 대접을 한다.
이런 식으로 그동안 기부한 돈이 50여억 원이 넘는다. 더 놀라운 것은 배 사장이 ‘어도’에서 벌어들이는 돈을 모두 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은 배 사장 소유의 빌딩에서 나오는 임대료 수입으로 생활한다.
배 사장은 2009년부터는 매년 2천만원의 기금을 조성해 전·현직 직원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어느 날 화장실에 앉아있다가, 직원들이 ‘우리한테나 좀 잘하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장이 직원들 복지는 뒤로한 채 남만 돕는다는 것은 안 될 일’이라는 생각에 직원 자녀를 위한 장학금을 조성하게 됐습니다.”
배정철 사장은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살다 보니 다 내게 돌아오더라”고 말했다. “‘어도’를 연 지 얼마 안 됐을 때 동네 건달들이 돈푼이나 뜯어보려고 몰려와 소란을 피운 적이 있어요. 그때 식사대접을 받고 있던 노인정 어르신들이 그들을 호되게 꾸짖어 쫓아 보내시더군요. 이 사실이 구청·경찰서 등에 알려지면서 ‘어도’는 ‘특별관리대상’이 됐습니다.
과거 일식집이 한창 호황이던 때에 벌이가 커지는 만큼 씀씀이도 커졌다가 1997년 IMF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 등을 겪으면서 뒷감당을 못 하고 무너진 사람을 여럿 보았어요. 하지만 기부를 하느라 씀씀이를 키우지 않은 덕분에 경제위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눔은 결국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나눔은 배 사장에게 자신을 아껴주는 고객들과의 인연을 이어가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하다. “제가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많은 분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 수가 많아지면서 예전처럼 일일이 인사를 드리지는 못하지만, 그분들께 제가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야말로 그분들에 대한 보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국민포장을 받은 데 대해 배정철 사장은 “안 보이는 데서 저보다 훌륭한 일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과분한 상을 받게 되어 그분들께 죄송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눔에는 크고 작고가 없지만, 기부라고 하면 왠지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인생을 정리할 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고요. 기부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의 수상이 ‘기부는 보통 사람들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글·배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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