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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그들이 있어 대한민국이 행복하다




상고를 졸업하고 통조림공장에 다니다 그만둔 28세 고졸 청년이 울산 학산동 허름한 가겟방에 ‘울산산소’라는 간판을 걸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직함은 ‘사장님’이지만, 리어카에 산소통을 싣고 시장통과 철공소를 돌며 판매하는 게 일이었다.

자고 나면 도로가 뚫리고 공장이 서던 1961년. 산소통 하나를 팔면 쌀 한 말 값이 손에 들어오고, 다섯 개 팔면 한달 생활비가 해결됐다. 하지만 청년의 꿈은 산소 도매상 잘 꾸려 가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에겐 두 가지 꿈이 있었다. 우선 큰 부자가 되고 싶었다. 그는 남들이 말리는 걸 무릅쓰고 일본에 드나들며 독학으로 기술을 익혀 산업용 가스 제조공장을 세웠다. 두 번째 꿈은 기부였다. 성공한 뒤 자신처럼 가진 것 없는 젊은이들에게 학비를 대 주고 싶었다.

가스 도매상으로 출발해 연 매출 1천5백40억원의 산업용 가스 제조업체를 일군 이덕우(78) 주식회사 덕양 회장은 개인 돈 5억5천만원을 들여 장학재단을 만들고, 매년 회사 순이익의 3~5퍼센트를 보탰다. 지금까지 청소년과 대학생 5백43명이 혜택을 봤다.




지난 4월에는 울산대에 5천만원을 기부했다. 그리고 지난 10월 19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을 기부하고, 개인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Honor Society)’에 가입했다. 부인 장선오(73)씨도 남편과 나란히 1억5천만원을 기부했다. 모금회는 “국내 첫 부부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라고 했다.

아너소사이어티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개인 돈 1억원 이상 기부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2008년 출범 이후 올 9월까지 49명이 가입했다. 1억원을 한꺼번에 내는 사람도 있고 여러 차례 나눠 내는 사람도 있다. 가입하면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건물 1층에 핸드프린팅 동판을 걸고 회원증을 준다. 정기모임과 봉사활동을 1년에 한 차례씩 하며 다른 혜택은 없다.

국내 한 언론은 아너소사이어티 회원과 그들의 가족 등 55명을 전수 조사해 지난 9월26일부터 7차례에 걸쳐 ‘나누는 사람들’을 보도했다. 단순한 미담 기사가 아니라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돈을 벌었고 지금 왜 기부하며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오길 꿈꾸는지 심층 분석한 시리즈였다.

아너소사이어티 창립 이후 회원들이 모금회에 기부한 돈은 총 87억5천5백만원이었다. ‘부호’라고 할 만한 이는 거의 없었다. 대다수가 중소기업을 꾸리거나 전문직으로 자수성가한 ‘작은 부자’들이었다. 특전사·해병대·학군단처럼 힘들고 긴 군복무를 마친 사람이 많았다. 특별히 학력이 높지도 않아 40퍼센트가 고졸·중졸 또는 무학(無學)이었다. 점심으로 찌개·국수·백반(41.7퍼센트)을 들고, 술은 소주(34.9퍼센트), 안주는 과일과 삼겹살을 즐겼다.

이들은 “고생해 봐서 어렵게 사는 사람 마음을 안다”고 했고, “없는 사람 불만을 방치하면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나라가 크니까 나도 큰 것”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기회를 준 한국 사회에 보답하기 위해 기부를 결심했고, 막상 내놓고 나니 너무나 행복하다고 했다. 요컨대 부(富)를 가졌다는 것을 넘어서서, 부의 진짜 가치를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박성중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은 “10월 들어 10명이 아너소사이어티에 새로 가입했고 또 다른 10명이 기부 절차를 밟고 있다”고 밝혔다. “기부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데도 여러 이유로 망설이던 분 가운데 기사를 읽고 기부를 결심한 사람이 많다”고 했다. 우리나라 경제규모에 맞게 기부문화가 널리 확산돼 머지않아 1백번째, 1천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나오는 것이 모금회 실무자들의 소망이다.

10월에 새로 가입한 회원들 역시 기존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부호가 아니었다. 박병출(49) 태현메가텍 대표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끼니를 거를 정도로 어렵게 자랐다. 공고 졸업 후 지게차 임대회사 직원으로 일하며 경남대 기계공학과를 마쳤고, 1989년 기계부품 제조업체를 차렸다.

이덕우 덕양 회장과 마찬가지로, 박 대표의 꿈도 자기 혼자 부자가 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사업이 차차 안정되자 2006년부터 매년 동네 고등학생 4명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그는 “장학금을 주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가 더 있을 텐데…’ 싶었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잘 몰랐는데, 신문 기사를 읽고 ‘이거다’ 싶었다”고 말했다. 앞으로 15년쯤 더 현역으로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총 4억원을 기부하는 게 그의 꿈이다.

신규 회원들을 보면, 기부자들의 면면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영돈(59·여행가)씨는 10년째 매년 1천만~2천만원씩 육군3사관학교와 이화여대에 기부금을 내오다 이번에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그는 “아들이 언젠가 ‘기부 그만하고 우리한테 물려주시지…’ 하고 볼멘소리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저는 아들에게 ‘돈이란 게 3대(代)를 못 간다’고 대답했어요. 언젠가 없어질 돈이라면 살아생전에 의미 있게 쓰고, 자식들에겐 올바른 정신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제 군인연금과 아내(교사) 연금을 합치면 생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꼭 부자만 기부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힘 닿는 대로 조금씩 모아 꾸준히 기부할 생각입니다.”

글·김수혜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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