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6월 3일자 <중앙일보> 1면에 인상적인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7년 전 그 바다, 윤영하가 돌아왔다….’윤영하(해사 50기)를 비롯한 6인의 전사(戰士)는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한일월드컵 3, 4위 결정전이 열리던 2002년 6월 29일 함정과 함께 분사(憤死)했다. 북한 함정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오더라도 공격하지 말라는 정부 지침을 따르다가 북한 경비정의 함포 사격을 받아 배가 침몰한 것이다. 그들이 탔던 배가 357 고속정이었다.
5년쯤 지나 신형 4백40톤급 유도탄 고속함이 진수에 들어갔다. 해군은 이 배에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357 고속정 정장 윤영하소령(전사 후 소령으로 추서)의 이름을 붙여 연평해전을 기린 것이다.
2007년 6월 28일 부산의 한진중공업 부두에서 열린 윤영하함 진수식에서는 윤 소령의 해군사관학교 선배이기도 한 아버지 윤두호 씨(해사 18기)가 참석해 눈시울을 붉혔다.
해군은 윤영하함 초대 함장에 1차 연평해전에 참전해 승리한 안지영 소령을 임명했다. 안 소령은 윤 소령의 해사 3년 선배로 1999년 6월 15일 북한 경비정들과 1차 연평해전을 치렀다. 당시 대위로 325 고속정 정장(艇長)이었던 안 소령은 338 고속정과 함께 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을 들이박는 전법으로 맞서 물리쳤다.
목숨을 던져서라도 NLL을 지키려 한 안지영 소령을 윤영하 함장에 임명한 것은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후 윤영하함은 삼성탈레스에서 개발한 전투체계를 탑재해 전투능력을 테스트하는 과정을 거쳤다. 윤영하함의 가장 큰 특징은 스텔스함이라는 점이다. 상대 레이더에는 같은 크기의 배보다 훨씬 작게 잡힌다. 그런데 1천2백 톤급 초계함에 탑재하는 76밀리 함포와 미제 하푼(Harpoon)보다 탁월한 국산 대함(對艦) 미사일 ‘해성(海星)’을 달고 있다. 크기는 작은데 은밀하고 검술이 뛰어난 ‘닌자(忍者)’가 바로 윤영하함인 것이다.
현재 STX조선소 등에서는 윤영하 소령과 함께 분사한 한상국,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중사와 박동혁 병장의 이름을 붙일 고속함이 건조되고 있다. 이 고속함이 완성돼 실전 배치되면 NLL은 불안의 바다가 아니라 철벽의 바다가 될 것이다.
‘리멤버 357’, 우리는 윤영하와 장병들을 해신(海神)으로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부활이지 개인의 부활은 아니다. 연평해전을 겪은 사람들은 아직도 고통의 바다에서 떠돌고 있다. 특히 6인의 전사자 유가족의 마음은 고통의 바다를 맴돌고 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 씨는 고속정 정장을 마치고 대위로 전역했다. 일찌감치 해군을 떠났지만 그는 ‘선진국에서는 해군이 1등이다. 해군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신사다’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바다에 큰 관심이 없었던 큰아들에게 해군사관학교를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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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합격해 생도가 되고 소위가 되고, 중위를 거쳐 다이아몬드 세 개를 달고 고속정 정장이 됐을 때 그는 참으로 든든했다고 한다. 아들은 가정을 지탱하는 기둥이자 이루지 못한 그의 꿈에 도전하는 대행자가 됐다. 이러한 아들이 최전선에서 한일월드컵이 평화롭게 열리게 하는 일을 하다 전사했을 때 그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다 지나간 이야기를 해서 뭣 하겠소. 아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준 해군이 고맙고, 국가 차원에서 보훈행사를 열어준 국민과 정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우리는 북한이 아니라 우리 군의 사기를 올려줘야 합니다. 윤영하함이 생겨남으로써 해군의 사기는 물론이고 국군의 사기도 올라갔다고 봅니다. 아들은 우리 집안의 기둥이었소. 지금은 보훈연금을 받게 해줌으로써 여전히 기둥 노릇을 하고 있어요.”
고(故)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 씨는 2차 연평해전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풍조에 크게 실망해 조국을 떠난 적이 있다. 남편이 전사하기 전 그는 남편과 함께 살 관사(아파트)에 입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입주일이 코앞에 닥쳤을 때 남편이 전사했고, 기다리던 관사도 날아가 버렸다. 남편이 전사해 더 이상 군인이 아니기에 관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김 씨는 이런 대한민국이 싫어 미국으로 날아가 3년간 힘겨운 삶을 살다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연평해전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해군 차원에서 치르던 2차 연평해전 추모제가 국가 차원으로 격상돼 국무총리가 참석하게 됐다. 김 씨는 국가보훈처가 유가족에게 제공하는 학비를 지원받아 대학에 입학했다. 확실히 세상은 바뀐 것이다.
음지가 양지 됐다고 모든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1차 연평해전 때 325 고속정에서는 안지영 대위와 조준행 하사를 비롯해 16명이 총상을 입었다. 방탄조끼와 철모 덕분에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아찔한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2차 연평해전에서는 6명의 전사자 외에 2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고통은 생존자에게도 강하게 남는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다. 상처를 볼 때마다 죽을 수도 있었다는 공포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생활을 어렵게 한다.
역사는 바꿔 쓸 수 있지만, 개인의 고통은 기쁨으로 쉬 바꿔지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이조차 소홀히 했다. 훈장은 1등급에서부터 5등급까지 있다.
1차 연평해전에 참여한 안지영 대위에게는 2등급(을지), M-60을 발사해 사태를 잠재운 영웅 조준행 하사에게는 5등급(인헌) 무공훈장이 수여됐다. 2차 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게는 3등급(충무), 4등급(화랑) 무공훈장이 추서됐다. 부상자들에게는 이보다 낮은 등급의 대우가 주어졌다.
북핵 위기와 미사일 위기가 고조되는 지금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를 위해 몸 바친 사람들을 진심으로 돌볼 때 우리의 안전은 더욱 공고해지기 때문이다.
글·이정훈(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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