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긴 가뭄 끝에 단비가 촉촉이 내린 지난 10월 23일 오후, 서울 명동의 메인 스트리트. 질퍽거리는 도로 사정 때문인지 거리는 평소보다 덜 번잡했지만, 일본인 관광객들은 다른 날보다 오히려 많았다. 일본 여고생 수학여행단의 한 무리를 인솔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의 말처럼 “명동 거리가 도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이날 엔화의 가치는 1400원(100엔당)을 훌쩍 넘었다. 일본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작년에 먹은 1인분 불고기를 같은 돈을 내고 ‘1인분 더’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서울은 이번이 처음인데, 어제는 시내 면세점과 남대문을 구경하고 오늘은 점프 공연을 보러 갈 생각이다.” 24살의 직장인 여성 스즈키 마이 씨의 첫 번째 한국 방문은 역시 쇼핑이었다. 스즈키 씨는 “일본에도 액세서리는 많지만 남대문이 더 다양한 것 같다”며 “상가든 음식점이든 모두 활기가 넘쳐 보여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가기 전에 꼭 사고 싶은 쇼핑 품목은 “화장품과 김, 김치”라고 대답했다. 동갑내기 친구와 동행한 스즈키 씨는 “난타 공연이 유명하다고 해서 한국에 와서 꼭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티켓을 구하지 못해 그와 비슷한 공연을 골랐다”며 쇼핑백에서 ‘서울’이라는 제호의 여행잡지를 꺼내 들고 그들만의 명소를 찾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이날은 유난히 일본 여고생들이 많았다. 일본인 학생 5~6명에 1명의 가이드가 조를 이뤄 명동, 대학로, 코엑스몰 등 서울의 명소를 찾아다니는 게 일본인 수학여행단의 전통적인 코스란다. 하얀 블라우스에 깔끔한 남색 치마 교복, 같은 계열의 스타킹과 단화를 신은 여고생들이 떼를 지어 일본말로 깔깔거리고 다니는 통에 명동 거리는 ‘남색 물결’로 출렁댔다.
엔화 강세로 일본인 관광객 증가
일본 전문 여행사 ‘플래닛재팬투어’를 운영하는 양재열 사장은 “딱 이맘때가 일본 중·고등학교의 수학여행 시즌인 데다, 일본인들이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나가는 시기”라며 “게다가 요즘 엔화까지 뛰어 앞으로 당분간 일본인 관광객은 늘어날 것 같다”고 전망했다.
명동의 메인 스트리트 한중간에 떡 버티고 서서, 잡담을 나누는 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수학여행단을 이끌고 온 고등학교 선생님들이다. 이시가와현 가나가와시의 모야마다이 고등학교의 선생님들로 명동 일대에 흩어진 250명의 학생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여행 코스를 짜는 일은 일본의 현지 여행사에 맡겼는데, 첫날은 서울 시내에서 경복궁·종묘·명동·남대문 시장을 둘러보고, 내일은 판문점 통일전망대를 견학할 생각입니다. 작년까지는 주로 오키나와 섬에 갔는데, 올해 처음 한국으로 오게 됐어요. 우리 학교와 한국의 경기도 광주에 있는 청강고등학교와 교류를 하고 있는데, 그게 계기가 돼서…” 작은 키로 다부진 체격에 머리를 짧게 깎은 체육선생님 가와기시 데츠야(41) 씨의 말이다. 역사 과목을 가르친다는 후루야마 가가쿠(35) 씨는 “오전에 경복궁을 둘러봤는데, 이시가와현에 있는 신궁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크고 웅장해 보였다”면서 “궁궐 처마의 기둥과 단청의 색깔이 일본보다 훨씬 화려하고 기교가 있는 것 같다”고 한·일 간의 전통 건축양식을 비교해가며 평을 내렸다. 셋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마츠모토 노보루(50) 씨는 “한국은 처음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교통 체증이 심해 많이 놀랐다”면서 “그러나 대도시답게 어딜 가나 익사이팅한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서울 여행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최근 한국을 찾는 일본 여행객의 주류는 20~30대 직장인 여성들이라는 게 여행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여행 행태도 많이 바뀌었다. 일본 관광객 특유의 ‘깃발 단체’ 대신 잡지나 가이드북을 보고 스스로 여행지와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외국인의 국내 여행 알선을 전문으로 하는 에이치아이에스의 김영근 과장은 “일본과 중국 등 한국을 가장 많이 찾는 이들의 주 여행 목적은 쇼핑과 맛집”이라며 “가격과 질 면에서 경쟁력이 있는 우리의 쇼핑 테마여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관광공사가 올 상반기에 조사·발표한 ‘외국인 관광객 실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음식 탐방, 서울에서 가까운 여행지(DMZ, 춘천 ‘겨울연가’ 세트장 등), 쇼핑, 역사·문화유적 순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자연 풍경 감상’은 상대적으로 후순위를 차지했다. 올해 한국을 방문한 각국 586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사실 중국처럼 거대한 스케일의 문화유산과 천혜의 관광자원, 일본처럼 선진화된 관광 인프라를 갖추지 못한 한국은 아직까지 ‘동북아시아에서 꼭 둘러볼 만한 곳’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살린 여행 인프라가 절실하다고 업계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같은 날 인사동의 어느 필방 앞에서 한지로 만든 편지지를 구경하고 있던 영국인 퍼스테딕 알렉스(26) 씨도 같은 맥락의 말을 했다. “한국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왔는데, 사실 한국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오늘 남산타워와 남대문, 인사동을 둘러봤다. (서울 도심은) 너무 복잡하고 (인사동은) 태국이나 중국의 시장과 비교해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이 없어 아쉽다. 하지만 오늘 점심에 먹은 사찰 음식은 참 맛있었다.”
한국에 오는 외국인들에게 가장 끌릴 만한 여행지와 여행문화는 어떤 것일까. 10여 년 전부터 한국에 단기로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국내 여행을 알선하는 ‘어드벤처코리아’의 박석진 사장의 말은 귀 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매 주말 45인승 버스 한 대를 채우기가 힘들었지만, 요즘은 2~3대 정도를 운행할 정도로 외국인 손님들이 늘었다고 밝혔다.
제주도·설악산·부산·DMZ·경주 ‘필수 코스’
“외국인들이 꼽는 한국의 여행지는 대개 비슷해요. 행선지로 보면 제주도, 설악산, 부산, DMZ, 경주 이렇게 다섯 곳이 필수라고 자기네들끼리 얘기해요. 테마는 템플스테이, 어드벤처 그리고 요즘에 산행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늘었어요. 좋아하는 메뉴도 달라졌어요. 예전에 한국의 넘버원 음식이라면 다들 비빔밥을 찾았지만, 최근엔 김치찌개·된장찌개·청국장을 찾는 친구들이 많이 늘었어요. 웰빙 바람에 자기네 나라에선 채식주의자로 살았어도 우리나라의 김치찌개에 들어간 돼지고기는 잘 먹더라구요. 뭔가 한국적인 것을 좋아하는 거죠.”
반면 외국인들이 혼자서 한국을 여행하기 어려운 점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라고 박 사장은 덧붙였다. “일부 유명 관광지는 이정표도 잘못된 곳이 많다”며 “관광 상품을 선보이기에 앞서 이런 것부터 정비하는 게 우선인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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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