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 피와 투표로 이룬 민주주의 위대한 전진
건국 60년사에 길이 남을 가치라면 역시 민주주의를 쟁취한 우리 국민들의 의지를 들 수 있다. 일부에서는 “한국인=정치동물”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 이 같은 관심이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원동력이라 할 것이다.
이승만 초대 정부는 해방 이후 정부 수립을 서둘렀다. 북한이 소련을 등에 업고 신탁통치를 찬성할 때 이승만 정부는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정부 구성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어렵게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부통령에 이시영, 대법원장에 김병로, 국무총리에 이범석, 국회의장에 신익희, 감찰원장에 정인보 선생을 각각 임명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정통성과 좌우파를 아우르는 거국내각을 구성했다.
특히 상해 임시정부, 블라디보스토크 좌파정부도 유일하게 이승만 정부를 인정해 정통성 시비를 일축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행정부로의 권력집중과 독재에 따른 부패가 심화되면서 1960년 ‘4·19 의거’를 시작으로 수명을 다하게 됐다.
독재 정권을 물리쳤지만 민주주의는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이후 들어선 민주당 정부는 집권 1년 만에 군부에 의해 물러나는 신세가 됐다.
1961년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근대화’를 국정지표로 내세우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박 정부의 이 같은 정책은 경제 부문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박 정권이 물러난 후 잠시 몇 개월 동안 ‘서울의 봄’이 있었지만 1980년대도 군사 정권으로 문을 열었다. ‘12·12’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부는 ‘경제 제일주의 원칙’을 천명하고, ‘복지’와 ‘안정’에도 신경을 썼다.
노태우 정부는 ‘보통사람의 시대’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제6공화국의 주인이 됐다. 전두환 정부 시절의 ‘6·29 선언’이 노태우 정부 탄생의 시발점이 됐다. 노태우 정부는 군사정권의 연상선상에 있으면서도 5공의 잔뿌리를 털어내려고 애를 썼다. 5공 청문회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높아만 가는 국민들의 정치 수준과 여소야대 정국은 정부의 부담으로 다가왔고 경제가 하강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김영삼 정부는 30년간의 군사 정권을 마감하고 ‘문민정부’로 출범했다. 집권 초기 김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공직자재산등록제’ 등 거침없는 개혁을 펼쳤다. 또한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기아그룹, 해태그룹 등 대기업들의 몰락 속에 IMF 구제금융 사태를 낳으며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이후 ‘국민의 정부’란 이름을 내걸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다. 김 전 대통령은 집권 후 IMF로 신음하고 있는 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노무현 정부는 초유의 탄핵 사태를 겪는 등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참여정부’는 소득 불평등 해소, 대미 관계의 자주성 등을 특히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는 ‘실용정부’를 국정철학으로 내걸었다. 이명박 정부는 촛불 정국 후 청와대 진용을 재정비하고, 개각을 단행하는 등 국민과 소통에 주력함으로써 실용정부의 철학을 본격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가는 데 힘을 쏟고 있다.
# 국내총생산 세계 13위 ‘한강의 기적’ 우뚝
독일의 경제 부흥을 ‘라인강의 기적’으로 표현하며 부러워하던 대한민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을 때 세계의 시선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꿀꿀이죽에 초근모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한국이 건국 60년 만에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제 발전사를 소개할 때면 우습게도 우리 스스로가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난 6월 초 해방신학자인 파라과이의 루고 신임 대통령이 다른 나라를 물리치고 첫 방문국으로 우리나라를 택했을 때도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사실 우리 경제가 이처럼 발전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48년 우리가 정부를 수립했지만 경제 사정은 엉망이었다. 더욱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나마 있던 경제기반마저 사라져 국민들은 큰 도탄에 빠지게 됐다. 이 때문에 1950년대에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로부터 식량이나 생활필수품을 공수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을 정도로 국민 대부분이 굶주렸다.
정부 관계자는 “1950년대 우리나라는 볼펜 한 자루도 만들지 못하고 1인당 국민총소득도 67달러에 불과했다”며 “지금은 상상치 못할 정도의 생활고를 겪었다”고 술회했다.
1960년대 들어서는 이 같은 생활상에 점차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경제 부흥을 최우선으로 하는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시멘트, 비료, 정유, 철강 등 다른 산업의 바탕이 되는 중화학공장이 세워졌고 일자리도 늘어나면서 국민들의 생활은 점차 펴지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경제성장이 탄력을 받았다. 정치는 군사정권에 의해 뒷걸음질 쳤지만 국민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좋아졌다. 공업화가 정착되면서 철도, 고속도로, 항구, 통신시설 등 사회간접자본시설의 건설이 활발했고 옷, 장난감, 가발 등과 같은 경공업은 우리 경제가 해외로 진출하는 시발이 됐다. 특히 1977년에는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는 경사를 맞기도 했다.
이 무렵 농촌지역에서는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됐다. 1971년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탈바꿈 시키는 등 농촌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1980년대는 경공업 위주였던 수출상품이 중화학제품으로 변화되는 시기였다. 그동안 수입에 의존하던 전자, 자동차, 기계, 철강 등 공산품이 수출 전면에 나섰고, 쌀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져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도 5000달러를 넘어서 ‘대망의 80년대’라는 목표를 실천할 수 있었다.
1990년을 기점으로는 반도체, 전자, 선박, 자동차, 컴퓨터, 휴대전화 등 기술 수준이 높은 공업제품의 수출이 많아졌다. 각 가정에서는 자동차를 한 대꼴로 보유했을 정도로 생활 수준도 윤택해졌다.
우리의 경제적 성장은 수치로도 입증된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지난 5월 공개한 ‘세계경쟁력 연감 2008’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은 55개 국가 중 31위, 국내총생산(GDP)은 2007년 9570억 달러로 세계 181개국 중 13위를 차지했다. 또한 무역은 세계 10위권, 석유 소비는 세계 7위권을 나타냈으며, 2007년 말 현재(지식경제부) 세계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한국산이 메모리반도체, 냉장고, 에어컨, LNG운반선, 선박용 디젤엔진 등 무려 26개 품목에 달하고 있다.
경제계의 한 관계자는 “고유가, 고원자재가 등 우리 경제에 돌발변수가 생겨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나 한강의 기적을 이룬 저력을 볼 때 충분히 극복 가능한 것”이라며 “어려운 시기를 벗어나면 경제 기초여건을 더욱 튼튼히 해 재도약을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다문화시대… 문화적 포용성 넓힐 때
우리는 예로부터 ‘단일민족(單一民族)’이란 말을 즐겨 썼다. 좀 과장을 붙이자면 한민족 한겨레가 하나의 자랑거리였다. ‘다민족 다인종(多民族 多人種)’ 국가이던 서구 사회를 색안경을 끼고 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단일민족’, ‘백의민족(白衣民族)’만을 고집하기에는 시대가 많이 변했다. 더욱이 향후 소위 말하는 ‘다문화 사회’가 보편화될 것으로 보여 관련정책도 시급히 정리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외국인 체류가 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전후로 이 때 개최된 서울올림픽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또한 제조업을 중심으로 인력난이 심화되면서 동남아를 중심으로 산업연수생이 들어왔고 이를 기점으로 장기체류자와 다문화 가정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영향으로 지난 4월을 기해 국내 체류 외국인이 100만명 시대를 맞았다. 남한 인구를 5000만명으로 칠 때 2%가 외국 출신이란 얘기다.

외국인과의 혼인도 크게 늘었다. 2000년 33만4000건, 2001년 32만 건, 2002년 30만6000건, 2003년 30만4000건, 2004년 31만 건, 2005년 31만6000건, 2006년 33만2000건, 2007년 34만5000건 등 매년 30만여 건씩이 꾸준히 성사됐다.
이에따라 전문가들은 앞으로 다문화 정책은 ‘동화’보다 ‘소통과 관계증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김주호 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장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다문화 사회의 문화적 지원정책 대토론회’에서 “한국에서의 다문화 이슈는 외국인과의 결혼 확산 등으로 곧 2세문제로 발전할 것이므로 대증요법이 아닌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다문화 정책은 궁극적으로 사회통합을 위한 정책이므로 소수자의 동화 못지않게 다수자의 문화적 포용성이 증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