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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지난 연말 서울 도심에 나가기 전에 들렀던 중국 음식점에서 뜻밖의 사람들을 만났다. 경기도에 사는 한 시인과 두 소설가가 간단한 음식을 시켜놓고 앉아 있었다. 안면은 있지만 사사롭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분들이고 나 또한 오랜만에 오는 식당이라 우연을 넘어 굉장한 행운처럼 느껴졌다.

그분들도 두어 시간 전에 가까운 곳에서 무슨 회의가 있어 왔다가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잠시 낯모를 식당에 들어온 것이라 했다.

4인용 식탁 한 귀퉁이에 끼어앉은 나는 점심을 주문했고, 그들은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각자 한두 시간 뒤에 약속이 있어 시간 제약이 있는 데다 사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없던 사이다 보니 평생 가장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오가는 분위기였다.

알 만한 사람들에 관한 포복절도할 일화가 한 바퀴 돌고 난 다음이었다. 원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것으로 소문난 시인이 몇 년 전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언젠가 미국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만난 어떤 성직자 한 분이 영어를 거의 못 하면서도 현지인과의 소통에 전혀 어려움 없이, 또 포교에 다대한 업적을 쌓으며 살아온 비결을 이렇게 이야기하더라는 것이었다.

“영어는 말이죠. 딱 세 마디만 잘하면 됩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세 가지의 말로 응대하면 만사형통입니다. 첫번째는 두 손바닥을 위로 들어올리면서 외치는 감탄사 ‘오 마이 갓!’ 두번째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는 ‘리얼리(Really)?’라는 반문. 마지막 세번째는 그저 동조한다는 듯이 가볍게 콧소리를 섞어 ‘으흥’, 하는 건데 뒤를 살짝 들어올리는 게 요령이지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상투적인 이야기인 데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어 별다른 재미가 없었다. 말하는 당사자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그의 수준에 맞지 않는 평범한 처세언이어서 실망이 컸다. 결국 재주 없는 내가 나서서 더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고 그 때문에 만장일치의 야유를 받고 나서 겨우 분위기가 수습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누군가 뭔가 재미있고 반전이 기대되는 이야기를 꺼내면 그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오 마이 갓!”을 외치거나 눈을 왕방울처럼 뜨고 “리얼리?” 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평탄하게 흘러가는 중에 문장이 끊어질 때마다 두어 명의 입에서 “으흥”이 흘러나왔다. 그럴 때마다 박장대소가 이어졌다. 세 마디 추임새의 효과는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어떤 평범한 이야기라도 세 마디 추임새에 의해 순식간에 자못 흥미로운 일화로 변모했다. 이야기하는 사람 역시 처음에는 “하지 마!”를 외치다가 곧 청자들의 입에서 셋 중 어느 것이 나올지 예상하고 반전을 노리는 유희를 즐기기 시작했다.

아쉽게 그 자리가 끝나고 난 뒤 도심의 모임에 참석했다. 수십 명이 모인 자리의 일각에서 내가 그 세 마디 추임새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안 있어 그 자리는 웃음판으로 변했고, 다른 자리에서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지 기웃거리는 형국이 되었다.


두어 시간 뒤 내가 집으로 가겠다고 일어섰을 때 다른 자리에 있던 몇 사람의 입에서 “리얼리?”, “오 마이 갓!”이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그 추임새가 정말로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영어권에서 살아가는 데 대단한 도움을 주었을 것임은 분명했다.

용의 해 2012년은 그 어느 해보다 각자의 주장이 용솟음쳐 오르는 해가 될 것이다. 선거가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인터넷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급격히 발달해 말과 글을 통한 주장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주장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가, 설득력이 있는가, 힘이 있는가는 많다, 크다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다. 아무도 상대의 말을 새겨들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하고 남을 꺾으려고만 든다면 남는 것은 말의 전화(戰禍)밖에 없다. 그것은 분열이고 불화와 반목이며 아물 수 없는 마음의 상처다.

일단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추임새를 넣는다면 상대의 일방적 주장은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반응을 의식하고 그 반응에 부응하는 새로운 의미 있고 유익한 것을 꺼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게 대화의 시작이다.

이 맑은 아침에 바라기는 이 해가 끝날 무렵, “오 마이갓,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지?”, “리얼리?” 하고 우리의 놀라운 변화에 대해 다른 나라의 누군가 물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글·소설가 성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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