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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참된 민주주의 열망 시민 모두가 주역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심현수(이하 심)/ 전 그때 여섯 살이었기 때문에 아는 것이 없지만 비디오를 통해서 6월 항쟁은 여러 번 봤습니다. 참 감격스러운 장면도 많은데 그 당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셨나요?

김거성(이하 김)/ 그 당시 저는 막 안수를 받고 목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였어요. 그런데 학교 후배인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서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죠. 이한열대책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열심히 싸웠습니다. 하도 교회를 비워두니까 결국 잘리고 말았지만요. 또 교회에서 호헌철폐를 위한 삭발 단식기도를 하는데 그 주변에서 활동했었죠.

최진섭(이하 최)/ 경우에 따라 말 한 번 잘못하면 전대협 친구들한테 ‘뭐 하러 그딴 소리를 해?’ 라고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고, 참 이 자리가 어렵네요. 전 그때 숭실대 총학생회장으로 있었는데 매일 데모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6·29 선언이 나기 전까지는 학교에서 먹고 자면서 데모만 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6·29 선언 후 한 1년 만에 학교 정문을 통해 걸어 나올 때였어요. 그 때 학생회장들은 대부분 수배 상태였기 때문에 정문 통과는 상상도 못할 때였죠. 다른 학교에 회의하러 갈 때도 담을 넘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다 정문으로 학교를 나가는데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어요. 자유라는 것도 처음 느낄 때는 당황스럽더라고요.

김/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제가 77년도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됐는데 복학해서 보니까 후배들이 유인물을 돌리고 있는 거예요. 그때 든 생각이 ‘저래도 되나’ 하는 거였죠.(웃음) 그전엔 유인물 한 장도 돌릴 수 없었어요. 그랬다가는 그냥 잡혀서 감옥을 갔거든요. 그런데 아무 제지도 없이 유인물을 돌리고 있으니 놀란 거죠. 6·29때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심/저는 눈이랑 코가 매워서 밖에 나가 놀지 못했던 기억은 나는 것 같아요.

최/ 여섯 살이었는데 매웠다는 기억을 하는 것만도 대단하죠.

심/ 사실 그게 그 때였는지도 모르겠어요.(웃음) 선배님들께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호응했다니 정말 부럽네요. 조직하지 않았는데 학우나 대중들이 그렇게 나와서 하는 것에 대해 상상도 전혀 안되고요.

김/ 87년 당시의 학생운동이나 재야운동 지도부가 지도력이 탁월하거나 조직력이 뛰어나서 6월 항쟁이 생긴 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어요. 그만큼 국민들의 독재에 대한 분노, 저항의식이 일반화됐던 거죠. 그리고 그 힘이 6월 항쟁을 움직인 바탕이 된 거죠.

최/ 약간 역설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그게 부럽다는 게, 몇 천 명이 데모하는 상황이 좋은 거라고만 할 수는 없어요. 그만큼 억압을 받았다는 거거든요. 학생뿐 아니라 가정을 건사해야 하는 가장들이 처자식 생각하면 유치장 가는 건 엄두도 못내죠. 그런데 그런 것도 다 버리고 데모를 한 걸 보면 그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거예요.

‘내가 배부른 돼지로 살아야 돼?’ 라는 생각에 꿈틀한 거죠. 어찌 보면 그 단계를 넘어서 기본권을 누리기 때문에 요즘 학생들이 꿈틀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 시절에 유인물 한 장 뿌리면 그대로 감옥행이었어요. 유인물 한 장에 자기 인생을 걸어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유인물 뿌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구조적인 모순이 그다지 변하지 않은 측면이 있지만 87년 6월에 일반 대중들이 간절히 원했던 인권이, 요만큼의 자유가 얻어진 거죠.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희생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같지만요. 그런데 단언하지만 독재시대가 오면 또 수천 명이 모일 거예요.(웃음)

김/ 정말 독재 체제 속에서 억압을 받으면서도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위해 헌신했던 것에 비해 지금은 그런 중요성을 너무 소홀히 여기는 것 같습니다.

최/ 그러게요. 역사적 계승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이 아닐까요? 박정희 딸을 지지하는 거 보면 역사가 단절된 걸 느껴요. 유인물 한 장 뿌릴 자유조차 없던 시대가 지금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 된 거예요.

김/ 개발시대의 향수 이런 거 보면 너무나 빨리 그 시대가 어땠었나 하는 것에 대한 망각이 있지요. 이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가를 바라볼 때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데 이유가 있어요. 바로 망각이에요. 망각으로부터 잘못된 선택이 이루어지는 거죠.

최/ 그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에는 대중노선을 채택한 것도 조금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희 학교가 86년 대중 노선을 채택하고 시위를 할 때 화염병 없이 박수만 친 적이 있어요. 최루탄이 안 터지니까 아무도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보는 거예요.

김/ 저도 그 때 ‘이제 무르익었구나, 때가 됐구나’ 하는 게 느껴졌어요. 6·10을 준비하는데 그동안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동문들, 목회자들, 친구들 이런 사람들이 아주 대거 몰려드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아, 이건 사람들 다수가 변화를 열망하고 있고 이러면 무엇이든 가능하겠다’는 느낌이 들었죠. 다만 이게 미답의 길이기 때문에 어떻게 펼쳐질 것이냐에 대한 그림은 저로서는 전혀 예상 못했어요.

최/ 모든 운동이나 혁명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데 6월 항쟁도 그랬던 거죠. 80년대에는 광주항쟁을 중심으로 5월제를 크게 했어요. 그동안 집회를 해도 조직원이나 운동한다는 사람들 100~200명 모이는 게 다였죠.

그런데 87년에는 300~400명이 모인 거예요. 스크럼을 짜고 나가다가 어느 순간 뒤를 돌아봤는데 대열의 끝이 안 보이더라고요. 핸드백을 맨 여학생도 있고, 도서관에서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보이기도 하고… 진짜 끝이 없었죠. 그걸 보고 느낌이 정말 이상했어요. 그리고 이게 6월까지 이어진 거죠.

김/ 6월 항쟁이라고 하면 재야 등 지도부 얘기를 많이 하지만 사실은 거기에 이름 없이 참여하던, 수많은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헌신적으로 싸움에 참여했던 대중 그 사람들이 진짜 주역이었거든요.

최/ 맞습니다. 그 때 운동한다는 사람은 다 명동이다 어디다 시내로 나가 있었어요. 그런데 학교를 한 바퀴 도니까 어느새 뒤에 2백, 3백 명이 뒤따라온 거예요. 너무 놀랐죠. 소위 운동권은 학교에 없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그대로 스크럼을 짜고 정문으로 나갔습니다. 숭실대 학생들은 정문을 밀고 나가 상도동 삼거리까지 가는 게 소원이었어요. 막는 사람도 없어서 그냥 밀고 나갔더니 어느새 상도동 삼거리까지 나와버리더군요. 그런데 당황스러운 거예요. 앞으로 나가야 할지, 아니면 그냥 있어야 할지 도통 감을 못 잡겠더라고요.(웃음)
그 당시는 그렇게 에너지가 넘친 거죠. 그 에너지가 전염돼서 시위할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거나 족구하던 친구들까지 함께 한 거예요.

김/ 정말 그때는 민주화 운동과 상관없어 보이던 사람들까지 길거리를 메웠죠. 운동권은 촉발제 역할 정도였고 일반 대중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힘이었어요. 나중에 민주동우회를 만드는데 학교 다닐 때 운동과 상관없어 보이던 사람들까지 다 참여했어요.

그런 걸 보면서 ‘아주 넓게 퍼져 있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독재체제를 반대하고, 열정적으로 극복하고자 했구나’ 라는 걸 느꼈는데 저로서는 아주 큰 충격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것이 6월 항쟁의 가장 중요한 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한열 장례식 때 시청 앞을 메웠던 인파는 누가 조직한 게 아니라 이 사회의 민주주의를, 변화를 열망하는 대중들이 만들어냈다 이런 겁니다.

심/ 저는 동아리에서 6월 항쟁을 현대사 중에서 드물게 승리한 싸움으로 배웠어요. 그 덕분에 전체적인 민주주의를 획득할 수 있었고, 지금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을 민중들이 움직여서 얻어낼 수 있었다. 흔히 말하는 ‘민중이 뭉치면 할 수 있다, 얻을 수 있다’를 보여준 가장 극적인 사례다. 이렇게 보는 거죠. 요즘 6월 항쟁에 대한 평가가 다양한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 6월 항쟁의 주역들이 이 사회 곳곳에서 여러 변화를 만들어내며 활동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자꾸 정치인들만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사업하는 사람, 교사, 종교인, 출판인, 정말 여러 영역에 퍼져 있는데 말이에요. 이 사람들이 과거로부터 조금씩 변화를 일구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 사회에 변화의 물줄기가 계속되는 것이라는 적극적인 평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6월 항쟁을 몇몇 사람으로 국한시켜서, ‘지금 그 사람이 뭐하고 있는데?’ 라고 묻는다면 6월 항쟁의 핵심을 놓치는 거예요. 정치나 어디 지도자로 활동하는 사람보다 경적 한 번 울리고 손수건 한 번 흔들던 그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돼요.

최/ 6월 항쟁 결과물로 직선제 개헌이 나왔지만 4·19 이후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을 거치며 사회 전반에 걸쳐 받아왔던 그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봐요.

고등학교 때 머리 1, 2cm에 대해 통제하고, 교련시간이면 당하는 부당함 등 모든 교육이라든지 언론 경제 사회전반에 걸쳐 온몸으로 느꼈거든요. 부자유스러움에 대한 저항이 6월 항쟁으로 왔는데 그 중 직선제만 된 거잖아요?

그 많은 사람이 헌신했던 바탕에는 자주 민주 통일이 깔린 거였어요. 자주 민주 통일 중에 뭐가 얼마만큼 됐나 따져보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현대사의 사례로 공부한다니 정말 역사가 됐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니 요즘 학생들은 6월 항쟁이 도무지 실감이 안 나겠어요.

심/ 실감은 안 나지만 우린 비디오 세대라서 시청각으로 많이 봤습니다.

최/ 아, 비디오…. 그거 정말 큰 힘이죠. 제가 군대 제대하고는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85년 9월에 복학했는데 10월에 광주 비디오를 보게 됐죠. 그걸 보고 ‘아직 평화시기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홱 돌아서 책을 덮었어요. 광주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었거든요.

김/ 비디오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 뭔가요?

심/ 의경한테 어머님들이 꽃을 꽂아 주던 거랑 넥타이 부대요. 회사원들이 스크럼을 짜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계단을 내려오더군요. 만날 저희가 집회할 때마다 따가운 시선을 주던 아저씨들인데…(웃음) 그리고 저 때 저분들이 바로 우리 아버지 또래거든요? 우리 아버지도 저랬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 넥타이 부대라고 해서 지금 다 그대로 그 때의 열정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나 하는 걸 보면 그건 아니고요. 그 때 아무런 기여를 안 했다고 해서 엉망으로 사는 것도 아니에요. 결국 그 시점은 역사가 된 거고 지금은 또 다른 시대로 봐야죠. 지금이 주는 의미는 6월 항쟁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를 지금은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그런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심/ 저는 아직도 우리에게 억압이 있는 것 같아요. 선배님들 얘기를 듣다보면 세상이 좋아졌구나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앞으로 6월 항쟁이 어떻게 계승되어야 올바른 것일까요?

김/ 저는 6월 항쟁의 진짜 주역, 그러니까 지도부가 아니라 진짜 주역들이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반성하고 내가 참여해서 이루어낸 6월 항쟁의 정신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 돌이켜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자기 삶의 영역뿐 아니라 한국사회 안에서 민주화라는 하나의 단계를 건너왔는데 그것을 제대로 발전시키기 위한 과제를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길거리에서 손수건 흔들었던 사람, 경적을 울렸던 사람, 길거리에서 애도를 표한 사람 등등 그 주역들이 자기 자리에서 6월 항쟁의 배반은 없는지 되돌아보고 다시 그 자리에서 노력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20년의 기념이라 생각합니다.

최/ 개인적으로는 20대가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6월 항쟁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마 40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예요. 제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딱 소시민으로 전락했는데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게 너무 어려워요. 20대 때 개개인이 목표하던 바가 다르겠지만 진리와 자유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자기 몫을 계속해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시점에서는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인의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대중들이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식인들이 그 방향을 잘 잡아줘야 합니다. 한 번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면 되돌리기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니까요. 6월 항쟁에 대해서 지식인만이 할 일은 아니지만 역사적 의의에 대해 잘 정리하고 전파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사실이든 아니든 6월 항쟁이라고 하면 386, 정치인 이런 걸 떠올리는데 결국 ‘항쟁을 정치적 발판으로 삼고 자기가 출세하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순수하게 보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숭고한 정신을 잘 계승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심/ 지금 가장 가슴에 와닿는 말이 광주항쟁이나 6월 항쟁 이런 것들이 정치적으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들었던 이야기들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6월 항쟁에 대한 올바른 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제가 총학생회장이니까 제대로 된 총학생회장이 되기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결심도 서고요.

최/ 혹시 올해 6월 항쟁을 기념하는 집회를 하나요?

심/ 선배 총학생회장들이 해보는 게 어떻냐고 해서 고민중이에요. 그런데 저희는 6·10보다 6·15를 더 크게 생각합니다. 6·10은 비디오 상영 등 간단한 문화행사로 치르게 될 것 같아요. 

최/ 시사하는 바가 크네요. 6·15가 중요하다… 통일운동은 진행형이라는 것이군요.

정리/ 이선민 기자  사진/ 한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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