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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기부라고 하면 흔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떠올리며 서구에서 시작된 문화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옛날부터 우리 민족에겐 두레, 품앗이, 향약과 같은 나눔의 전통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수재의연금이나 연말 불우이웃돕기 성금 등은 이런 전통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배려와 나눔의 유전자가 우리 핏속에 흐르고 있는 셈이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우리의 기부문화는 점점 성숙해가고 있다. 대표적인 민간 기부단체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접수된 기부금을 보면 1999년 2백13억원에서 2008년 2천7백2억원으로 10년 사이에 13배 가까이 늘었다. 수많은 기부단체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도 이때부터다.

우리 민족은 어려운 때일수록 서로 나누려는 마음이 더욱 커진다. 지난해 하반기 1인당 실질소득(GNI)은 마이너스 증가율을 기록했지만 자선단체 ‘굿네이버스’에 들어온 기부금과 기부 물품은 오히려 30퍼센트 늘었다. 구세군 자선냄비 역시 펄펄 끓어 모금 총액이 35억2천만원으로 2007년보다 14퍼센트(4억2천만원)나 늘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2008년 연말모금행사에서도 2007년보다 5.6퍼센트(1백11억원) 늘어난 2천96억원이 걷혔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유수경 씨는 “기업의 기부도 늘었지만 개인 기부, 특히 10만원 이하의 소액 기부가 훨씬 많이 늘었다”고 전했다.




기부 방식도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신용카드나 교통카드를 통한 기부, 인터넷 쇼핑몰 등 온라인 사이트의 포인트를 모아 하는 기부 등 정보기술(IT)과 결합한 기부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다.

기업의 기부문화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이렇게 단기간에 기업의 사회공헌이 정착된 경우는 외국에서도 드문 사례여서 미국 하버드비즈니스스쿨에서는 한국의 사례를 연구할 정도라고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발간한 ‘2007년 사회공헌백서’에 따르면 전경련 소속 2백8개 기업의 사회공헌 관련 지출 비용은 1조9천5백56억원으로 기업 한 곳당 평균 94억여원에 이른다. 경상이익의 2.5퍼센트에 달하는 적지 않은 액수다.

경제포털 사이트 ‘재벌닷컴’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 10조원 이상을 기록한 24개 대기업의 순이익은 전년에 비해 33.4퍼센트나 급감했지만 기부금 총액은 7천8백71억원으로 오히려 4.7퍼센트 증가했다. 이에 따라 순이익 대비 기부금 비율도 2007년 2.7퍼센트에서 4.3퍼센트로 크게 높아졌다.

기업의 기부 형태 역시 ‘기증 물품을 박스째 쌓아놓고 기념사진을 찍는’ 식의 단계에서 벗어났다. 물품이나 성금 전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봉사활동 등과 결합한 사회공헌 활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또한 기업 이름을 내세운 기부에서 기업가가 개인 차원에서 사재를 털어 기부하는 개인 기부로도 발전하고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도 회사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을 개인 차원에서 기부한 것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도 최신원 SKC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 등 사재를 털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기업가들이 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12대 3백년에 걸쳐 조선시대 최고 부자로 통했던 경주 최부잣집엔 ‘육훈(六訓)’이라는 가훈이 있는데,‘만 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사방 1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어려운 사람들이 손을 집어넣어 잡히는 만큼 쌀을 가져가도록 구멍을 뚫은 ‘구멍뒤주’는 유명한 일화다. 이처럼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회지도층들이 더 늘어나야 한다. 



‘아름다운재단’에 따르면 현금자산을 10억원 이상 보유한 6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최근 3년간 기부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95.5퍼센트였으며, 이들의 연평균 기부액은 약 6백만원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나눔문화가 아직은 선진국들에 비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미국 국민은 연간 수입의 약 2퍼센트를 매년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개인 기부 비중이 국내총생산(GDP)의 1.67퍼센트에 달한다. 미국뿐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민간기부 총액이 대부분 GDP의 2~3퍼센트에 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0.4퍼센트(2007년 기준)에 불과하다. 국민 1인당 기부액만 비교해도 미국 1백13만원, 캐나다 35만원, 영국 34만원인 것에 비해 한국은 10만9천원으로 차이가 난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자료에 따르면 2007년 총모금액 중 개인 기부는 15.8퍼센트에 불과했다. 기업 기부가 67.5퍼센트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미국(2004년 기준)은 개인 비율이 75.5퍼센트이고, 기업은 4.8퍼센트에 불과하다. 선진국형 기부문화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개인 기부가 더욱 늘어나야 한다.

일부 기업들의 순수하지 못한 거액 기부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몇몇 대기업 총수는 자신과 가족의 불법, 비리가 사회문제로 불거지면 위기를 돌파하는 수단으로 재산의 사회 환원을 거론하곤 했다. 출연재산조차 사재가 아니라 기업의 돈인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사회적 범죄로 비난을 받은 뒤 회피성으로 내는 이른바 ‘속죄성 기부금’은 더 이상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글·최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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