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SBS 연중기획 ‘가족이 희망이다’ 취재후기


#1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일단은 살아남아야 미래가 있으니까요.”
한 대기업 제조공장에서 생산반장으로 일하는 진동철(47) 씨의 올해 화두는 ‘생존’이다. 진 씨는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 회사에서 명예퇴직 대상에 오른 적이 있어 지난해부터 부쩍 어려워진 경제사정이 전혀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 작은 아파트를 소유한 그는 올해 각각 고3, 중3 수험생이 되는 자녀를 두고 있다. 진학을 앞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진 씨는 ‘생존’ 두 글자를 매일 아침 가슴에 새긴다.

#2 “애들 잘 키우고, 회사 잘 돌아가게 해서 월급 받고, 안 죽고 살아남는 거죠. 다른 소망이 있겠습니까.”
반도체 장비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영천(46) 씨는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르며 매일 조깅을 한다. 건강을 잃으면 그날로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절박감에 7년 전부터 시작한 아침운동이다. 덕분에 동년배들에 비해 건강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제 김 씨도 쉰 줄이 눈앞이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앞으로 몇 년이 김 씨의 가계에는 가장 힘든 시기가 될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SBS 8시 뉴스는 올해 연중기획으로 ‘가족이 희망이다’라는 연속보도를 시작했다. 지난해 말 신년 기획을 구상하면서 기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주제가 바로 ‘가족’이었다. 미국발(發) 금융위기로 세계 경기가 위축되고 그 여파로 실물경제가 전방위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예상이 먹구름처럼 퍼져가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고난을 헤쳐 갈 원동력을 얻고 다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고민한 결과였다. 몇 번의 회의를 거쳐 연중기획을 다시 월별로 나눈 뒤 첫 달인 1월은 ‘가장’을 다루기로 했다. 가족의 리더, 곧 가장을 다시 세우는 것이 가족 구성원 전체를 위한 것이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힘을 다시 키우기 위한 시작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앞서 예로 든 진동철 김영천 씨는 통계청의 공식 통계를 통해 접근한 ‘대한민국 평균가장’이다. 평균 나이 47.6세, 고졸 학력에 제조업 종사, 전용 면적이 59.4㎡(18평)인 아파트에 산다. 자녀는 평균 1.3명, 10년 전에 비하면 소득이 75% 늘었지만 지출 역시 87%나 늘어 저축보다는 합리적 소비를 고민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평균가장’들이다.

같은 사회 속에서 지지고 볶고 사는 그들의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로 ‘자녀 교육’과 ‘노후 문제’가 그것이다.

가정의 가장 큰 역할이 ‘사회 구성원의 재생산’인 만큼 가장들이 갖는 자녀 교육 부담은 예상보다 훨씬 컸다. 자신의 학생 시절보다 대학 문은 넓어졌지만 여전히 ‘어느 대학 출신’이냐가 사회에서의 시작점을 결정하는 현실 때문에 가족 지출의 상당 부분은 교육비 몫으로 정해져 있었다. 특히 평균가장의 나이는 중고등학교에서 상급학교로의 진학을 앞둔 자녀를 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달리기 경주로 치면 결승선을 앞두고 마지막 힘을 끌어내야 할 시기임을 가장들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5명 중 1명 “하루 30분도 가족과 대화 못해”
[SET_IMAGE]2,original,right[/SET_IMAGE]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들의 ‘노후 문제’도 본인의 ‘제2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현실적 고민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평생직장 개념이 흔들리기 시작한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노후 문제를 실질적, 직접적으로 고민하는 세대는 40대 중·후반의 평균가장들이다. 10여 년 뒤 직장에서 은퇴한 뒤에도 20~30년은 더 살게 되는 고령화 사회에서, 지금까지 성인으로서 살아온 인생만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 가장들은 깊은 불안과 걱정을 안고 있었다. 특히 지난 호경기에 노후를 위해 투자했던 연금이나 보험, 주식 등이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기대치만큼의 결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심각한 문제로 가장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자녀 교육과 노후 문제가 가장들을 괴롭히는 현실적인 문제라면 사회적으로는 경기 회복, 개인적으로는 경제적 성공이 하나의 탈출구가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취재진이 만나본 가장들은 경제 상황과는 관계없이 ‘가장이기 때문에’ 하는 커다란 고민을 갖고 있었다. ‘대화 부족’이 그것이었다.

SBS는 이번 연중기획을 준비하면서 지난해 말 여론조사기관인 TNS와 함께 전국 1000명의 가장을 대상으로 전화설문조사를 벌였다. 가장의 위치와 고민을 아우르는 많은 조사 항목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가장과 가족 간 대화 시간이 하루 평균 1시간 15분이고, 5명 가운데 한 명은 하루 30분도 대화하지 않는다는 결과였다. 올해 고3, 중3이 되는 자녀가 있는 진동철 씨도 운동을 마치고 들어와 출근하기 전에 등교를 준비하는 아이들과 되도록이면 아침식사를 함께 하며 잠시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매번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퇴근하고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날이 많지만 아이들은 학원이다, 과외다 하며 늦게 들어오기 일쑤이고 한창 예민한 시기라 일부러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색해 한다고 했다.


힘겨운 2009년 ‘가족’이 사회적 키워드로
일터에서, 가정에서 취재진이 만난 우리 시대 가장들은 저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이 같은 고민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도 가족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키는 힘이고, 희망인 것은 ‘나 혼자’가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SBS 설문조사에서 가장의 60%는 힘들 때 의지하는 상대로 주저 없이 ‘배우자’를 꼽았다. 고민 많은 가장들의 힘은 역시 함께 그 고민을 나누고 의논해 가족을 꾸려나가는 아내(혹은 남편)임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가족이 희망이다’ 시리즈를 시작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SBS뿐 아니라 여러 기업과 사회단체들도 어려움 속에서의 희망을 ‘가족’에서 찾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족’을 다룬 영화나 문학작품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다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고, TV나 신문에서도 가족의 의미를 부각시킨 따뜻한 분위기의 광고가 성공이나 쾌락을 외치는 광고보다 훨씬 많이 눈에 띄고 있다. 이처럼 ‘가족’은 올해 우리 사회의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SBS의 연중기획이 시의적절하게 언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의제 설정’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을 다짐하면서, 1월의 ‘가장’에 이어 ‘엄마’ ‘자녀’ 등 앞으로 월별로 계속될 후속보도에도 많은 관심이 이어졌으면 한다.

글·유성재 SBS 사회부 기자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