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국내 방송사업자들은 방송이 대기업이나 신문 같은 이종(異種) 사업자들이 결코 들어와서는 안 되는 ‘청정지대’인 것처럼 신성화하고 있지만, 이는 다른 나라에서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방송과 출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익을 내고 동시에 ‘뉴스룸’을 운영하면서 공적인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이 해외 미디어 기업의 사업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한류(韓流)라는, 불과 몇 년 전까지 아시아 지역을 석권한 신드롬적인 현상을 만들어 놓고도 단순한 콘텐츠 해외 판매 수준에서 그치고 만 것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온 국내 방송사들의 후진성 때문이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선 미디어산업 발전을 위해 겸영을 허용하면서 여기에 다양한 조건을 다는 식으로 제한을 하고 있다. 우리처럼 ‘무조건’ 막아 놓고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미디어산업은 일단 한번 만들어진 콘텐츠를 외국 시장이나 다른 채널을 통해 유통시킬 경우 추가적인 비용 투자 없이도 새로운 시장에서 수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도 미디어 기업들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다우존스 등은 신문을 발행하는 것 이외에도 인쇄업, 잡지, 출판, 케이블 채널, 교육 등의 분야에 진출해 있다. 그리고 상당수 신문 기업들은 방송사를 소유하고 있다.
미국 미디어 기업은 활발한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키우고 이를 기반으로 해외까지 사업 영역을 넓혀왔다. 미국 3대 방송 네트워크 중 하나인 NBC의 모(母)기업은 세계 최대 기업으로 불리는 GE(General Electric)다. NBC는 1926년 미국 최초의 라디오 네트워크로 설립된 이후 RCA와 GE가 차례로 소유해왔다. 1941년에는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 허가권을 받았고, 1951년 전국 텔레비전 네트워크를 확립했으며, 1953년에는 최초의 컬러 방송을 실시한 역사적인 기업이다. 2004년 비방디 유니버설과 GE의 NBC가 결합해 NBC유니버설로 전환한 이후 해외 진출도 활발하다. 기존 NBC가 미국 내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사업자였다면 영화사인 유니버설과 결합해 본격적으로 콘텐츠 사업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최근 NBC가 폭스와 함께 출범시킨 UCC 사이트 ‘훌루닷컴’은 유튜브의 대항마로서 인기를 끌고 있다.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은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유럽, 아시아 등 세계 모든 지역에서 방송과 신문 사업을 펼치고 있다. 원래 호주 기업이었지만 2004년 본사를 미국으로 옮겼다. 운영하는 매체는 신문인 월스트리트 저널과 방송의 폭스 채널, 영화사 20세기 폭스, 영국 신문 더 타임스, 홍콩의 스타TV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다.
미국 미디어 기업의 복합화 경향은 소수의 주력 미디어 그룹이나 몇몇 앞서 나가는 신문사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텍사스의 갈베스턴시(市)에서 데일리 뉴스를 발행하면서 만들어진 벌로(Belo) 미디어 그룹은 미국 내 약 30위권의 미디어 그룹이다. 현재 4개 일간지와 20개 텔레비전 방송사, 2개의 지역권 케이블 뉴스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일반 일간신문이 방송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 일간신문을 발행하는 것까지 모조리 금지하고 있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독일은 미디어 간 교차 소유가 원칙적으로 가능하지만 방송국가협정 등을 통해 시청자 점유율 상한선 같은 것을 정해놓고 있다. ‘의견다양성 보장’ 조항 등으로 제한을 하는 주(州)도 있다. 이를 통해 독점적인 특정 기업의 미디어 시장 진출 등을 ‘제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율적인 ‘협정’이고 원칙적으로는 제한이 없다.
유럽을 여행할 때 호텔 객실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방송 채널 중 하나가 ‘RTL’이다. RTL은 독일 베르텔스만(Bertelsmann) 그룹의 주력 산하기업으로 베르텔스만 그룹 세전 수익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출판 그룹인 베르텔스만은 1984년 RTL의 경영권을 인수한 이후, 2006년 총 90.4%까지 소유 지분을 늘려왔다. 현재 11개국에서 34개 TV채널과 34개의 라디오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독일 RTL의 경우 종합편성채널 ‘RTL’과 뉴스전문채널 ‘n-tv’, ‘RTL홈쇼핑’과 3개의 전문 편성채널인 VOX(문화·드라마) ‘Super RTL’(어린이교양) 등의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여론 독과점이라는 말을 듣지는 않는다. 독일에서는 RTL 외에도 수십 개 채널이 공존하면서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기업의 소유 지분이 높더라도 미디어 시장에서 뛰는 ‘플레이어’가 다양할 경우 여론 독과점은 발생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중지 빌트(Bild)와 일간지 벨트(Welt) 등을 발행하는 독일 최대 신문 기업인 악셀 슈프링어 그룹(Axel Springer AG) 역시 신문과 잡지 발행을 주력 분야로 하고 있지만, 다매체 시대의 차세대 사업으로 미디어 콘텐츠 판매와 디지털 유통 분야에 뛰어들고 있다.


일본의 민영방송은 대부분 신문사들이 포함된 컨소시엄 형태로 출자해 운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도쿄에 기반을 둔 5대 지상파 민방의 경우 ‘니혼TV’는 요미우리신문이 최대 지분을 갖고 있고, ‘TBS’는 마이니치신문, ‘후지TV’는 산케이신문, ‘TV아사히’는 아사히신문, ‘TV도쿄’는 니혼게이자이신문이 갖고 있는 식이다.
이들 신문사는 나름대로 정치적 색깔이 뚜렷하지만, 방송이 신문 논조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전체 방송을 놓고 봤을 때는 여론의 다양성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 일본 방송의 여론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NHK다. NHK의 정식 명칭은 일본방송협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일본의 공영방송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방송 사업자들이 모인 협회 형태다. 그래서 각 방송사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민영방송이 이행할 수 없는 시청자의 복지를 실현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월드컵 중계권을 배분할 때도 보면 우리와 전혀 다른 형태로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일단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빅 매치’의 중계권은 광고회사인 덴츠가 먼저 일괄 구매한 뒤 이를 민간 방송사업자들에게 재판매한다. 이 과정에서 인기 프로그램의 가격과 방송시간 등이 정해진다. 민영 방송사들은 비인기 종목이나 경기의 중계권은 사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들 비인기 경기가 NHK의 몫으로 돌아온다. 올림픽 경기가 벌어졌을 때 한국의 스포츠 기자들이 한국 방송사들이 중계해주지 않는 비인기 종목을 NHK를 틀어 놓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공영 체제’를 앞세운 국내 방송사들은 서로 중계권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인기 경기만 같은 시간에 동시 중계하는 등 시청자들의 볼 권리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소수의 몇 개 방송사끼리도 서로 이해관계를 조정하지 못하는 기형적 구조로 유지돼온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세계 각국은 각기 다른 미디어 환경을 갖고 있다. 일본은 일본대로, 유럽은 유럽대로 자신들의 환경에 맞는 미디어 법과 제도를 만들어왔다. 결국 신문과 방송의 겸영 제한이나 소유지분 제한 등은 각국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오랫동안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막고 있던 프랑스가 세계적 미디어 그룹을 양성하기 위해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미디어 관련법을 개정하려 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오랜 세월 ‘여론 다양성’의 원칙을 고수해왔던 프랑스는 영미권 국가에 비해 미디어산업이 심하게 낙후된 상태로 방치돼왔다. 그 결과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 비해 내세울 만한 미디어 기업이 없고, 이들 국가의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상황을 맞게 됐다. 프랑스는 미디어 관련법 개정을 통해 화려한 ‘문화 강국’으로서의 자존심을 되찾고자 한다. 한 국가의 미디어산업의 융성은 그 나라 문화산업의 수준을 결정짓고, 국가 브랜드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도 미디어산업 곳곳에 가로놓여 있는 칸막이를 없애서 ‘문화 강국’으로의 비약을 준비할 때가 됐다. 모든 미디어가 자유롭게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이는 잠시도 시간을 늦출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글·신동흔 조선일보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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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