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문화/생활

다문화가정 돕는 선배 정착민들


 

“선생님, 너무 열심히 공부했더니 눈 빠지겠어요. 조금만 놀다 해요!”

“수업 시작한 지 5분도 안 됐잖아. 자꾸 떠들면 익현이에겐 칭찬 스티커 안 줄 거야~.”

서울 마포구 창천동의 ‘세이브더칠드런’ 건물 7층에서는 2주에 한 번씩 토요일마다 이 같은 승강이가 벌어진다. 모여 앉은 7명은 베트남 다문화가정의 개구쟁이들. ‘신나는 반’ 선생님인 레티투프엉(29) 씨는 아이들과 씨름하기 위해 토요일 한나절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했다.

하나금융그룹과 국제아동권리기관인 세이브더칠드런이 함께 운영하는 ‘하나 토요베트남학교’가 문을 연 것은 지난해 11월. 부모 가운데 한쪽이 베트남인이거나 베트남인과 재혼한 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벌써 6개월 이상 베트남어와 문화 등을 가르쳐 왔다. 이곳에는 프엉 씨를 포함, 8명의 베트남인 유학생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에 시집와서 아이 낳고 살면서 힘들어하는 것을 많이 봐왔어요. 안타까워하던 차에 저희 대학 유학생협회 부회장을 통해 자원봉사 제의를 받았지요.”

낮에는 인턴사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국민대 MBA 과정을 밟는 등 숨 돌릴 틈 없지만 프엉 씨는 참가의사를 밝혔다.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는 데다 자식과도 말이 통하지 않아 애달파하는 베트남 동포 여성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2주에 한 번씩 한 시간 남짓 하는 공부로 아이들의 베트남어가 확 늘기를 기대하긴 무리겠죠. 그래도 수줍어하면서 말도 걸지 않던 아이들이 먼저 다가와 장난도 치고 조금씩 마음을 열 때 피로가 씻은 듯 사라져요.”

프엉 씨처럼 직접 나서서 결혼이민자인 자국민들을 돕는 동남아 등지의 유학생들이 최근 많아졌다.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다문화가정 도우미를 자처하는 단체나 상담기관 등도 전국 곳곳에 생겨났다. ‘하나 토요베트남학교’처럼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의 건강한 사회 적응을 모색하는 학교 밖 교실이나 멘터링 사업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문화탐방이나 체험, 체육대회, 축제 등 다문화가정을 위한 일회성 행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보건복지가족부는 올 한 해 각 시군구 등 지방자치단체가 계획 중인 다문화가정 행사만 1천여 개가 넘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비정부기구(NGO) 여성활동가들을 재정 지원하는 한국여성재단도 다문화가정 지원자로 나서고 있다. ‘다문화다함께 프로젝트’를 통해 29개 단체와 손잡고 이주여성을 위한 직업 및 창업 훈련, 한글교실, 요리교실, 건강관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이주여성들을 위해 1인당 3백만원씩 긴급의료비도 지원하고 있다.
 

결혼이민자들이 가장 곤란을 겪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언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아이 학교도 안 가게 되고 관공서 갈 일이라도 생기면 덜컥 겁부터 난다. 보건복지가족부 위탁기관인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이렇게 말이 서툰 이들을 위한 통·번역 서비스를 제공한다. 모국어와 한국어에 두루 능통한 결혼이민자들이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훈련을 받고 통·번역사가 되어 동료 이민자들을 돕는다.

느구엔티응아(32·베트남), 최선애(33·중국), 문진수(42·방글라데시), 김 파카판(37·태국) 씨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을 꾸리고 사는 결혼이민자들이다. 나이도, 어머니 나라도 모두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회적 지원의 대상으로 인식되던 결혼이민자들이 같은 다문화가정과 이민자들을 돕기 위해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지난 3월 경기 고양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통·번역사 교육 과정을 통해 만났다. 4월 열린 고양국제꽃박람회에서도 함께 통역 자원봉사를 했다.

1995년 여행을 왔다가 만난 한국 남자와 결혼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은 김 파카판 씨. 몇 년 전만 해도 그녀는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던 그에게 2005년 큰아이 초등학교의 담임교사가 전화를 했다. 다문화가정 결혼이민자 학부모를 위해 한국어 교사를 집으로 파견해주는 프로그램이 생겼다는 것.

한국어 선생님과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집 안에만 갇혀 살던 그는 생전 걸음도 하지 않던 아이 학교에 나가 학부모들과 어울리며 주위를 둘러보게 됐다. “가장 기뻤던 건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정도로까지 성장했다는 점이에요.”

“이민자들 스스로가 후배 이민자들의 멘터가 돼야 한다”는 최선애 씨. 말설고 물 선 곳에서 고민을 안고 사는 이들의 처지를 같은 결혼이민자들만큼 잘 헤아릴 수 있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최 씨는 “꽃박람회 통·번역사가 되고 나니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 학부모들의 시선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는 주변의 색안경에 불평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자기계발을 통해 세간의 인식을 바꿔 보라고 결혼이민자들에게 당부한다.

느구엔티응아 씨는 3년 전 연수생으로 한국에 왔다가 가정을 꾸리며 눌러앉았다. 꽃박람회 같은 국제행사에 결혼이민자인 자신이 스태프가 되어 일할 줄은 몰랐다는 그는 “결혼이민자들도 얼마든지 사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17년 전 한국 관광을 왔다가 한국여성과 가정을 이루고 현재 경기 안양시에 사는 문진수 씨. 그는 고운 정만큼 미운 정도 많이 든 한국에서 “봉사할 수 있다는 게 마냥 행복하다”고 말한다.

인터넷 공간에는 이들의 인연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한 이주민 카페가 개설됐다. 카페명 ‘한다(cafe.daum.net/handa09)’는 ‘한국 다문화가정 모임’이라는 의미와 함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도 담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정기 모임을 가지며, 회비를 걷어 어려운 다문화가정을 지원할 계획이다.



 

 

지난 5월 26일 서울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동그라미극장에는 1백여 명의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고 있는 가수 겸 배우 임창정 씨가 있었다. 한솔교육과 극장이 함께 기획한 다문화가정 어린이 책 읽어주기 무대에 낭독자로 초대된 것.

임 씨가 <벽란도와 아라비아 상인>을 읽어 내려가자 초롱초롱한 눈동자의 아이들은 미동도 없이 이야기에 빨려들었다. 천년 전 고려 사람들의 외국인에 대한 열린 마음을 그린 책의 내용이 임 씨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타고 긴 여운을 남겼다.

임 씨는 “최근 뮤지컬 <빨래>를 통해 몽골에서 온 이주노동자를 연기하다 보니 결혼이민자들이나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처지와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때문에 낭독 제의를 받았을 때도 “망설임 없이, 오히려 설레는 마음으로” 응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다문화가정에 손을 내미는 일엔 임 씨를 비롯해 많은 연예인들이 동참하고 있다. 다문화가정을 후원하기 위한 연예인 축구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다문화가정 돕기 장터나 바자 등에 홍보 도우미로 나서는 연예인들도 많다. 개그맨 박미선 씨는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의 ‘다문화축제’ 홍보대사를 맡았으며, 박경림 씨는 다문화가정 합동결혼식 사회자로 나서기도 했다.

사회공헌 차원에서 기업들도 속속 다문화가정 지원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한국다문화센터가 주관하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한 ‘대학생 멘터링’ 사업에는 교원, 웅진씽크빅, 락앤락 등이 후원자로 나서고 있다. 한국다문화센터는 SK텔레콤, 스포츠토토, 명원문화재단 등과 함께 ‘다문화 어린이 합창단’도 창단할 계획이다.

한국다문화센터 김성회 사무총장은 “앞으로 창단될 다문화 어린이 합창단은 지방자치단체 등의 행사나 공연에 참여해 다문화가정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꼬마 홍보사절이 될 것”이라며 “이런 취지에 공감하는 기업들의 후원이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 키즈 오브 아시아’ 프로그램을 통해 다문화가정 어린이 지원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하나금융그룹 사회공헌담당 김현수 대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요즘, 사각지대에 놓인 다문화가정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책무”라고 강조했다.

글·손정숙 객원기자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