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중도란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바른 것을 뜻한다. 불교에서의 중관(中觀)이나 유교의 중용(中庸), 고대 그리스의 중용(Mesotes)이 모두 이런 뜻을 지니고 있다. 모두 현실에서의 적절함을 추구한다. 좋은 실용주의는 어떤 이론이나 이념보다 눈앞에 있는 절실한 문제를 헤쳐나가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 뜻에서 중도는 좋은 실용주의의 원리이며 모두 우리의 실제적인 삶을 좋게 만들려는 것이다.
중도실용주의의 한국적 전통은 그 뿌리가 깊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광신적이지 않았고 다른 신념들과도 잘 어울렸다. 고려 최고의 시인 이규보는 “유교와 불교는 지극한 이치가 동일하거늘 어느 것이 순수하고 어느 것이 잡되겠나”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옳고 그른 게 분명했다. ‘이단(異端)’이란 관념이 등장한 것도 조선시대가 처음이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시비와 사정(邪正)은 서로 용납될 수 없다”고 보았다. 당쟁은 이런 사고방식의 산물이었다.
당쟁이 심해지자 당색이 다르면 혼인도 않고 서로 용납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당색과 친하게 지내면 절개를 잃었다느니, 항복했다느니 하여 서로 배척했다. 이 때문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천지가 개벽한 이래 천하의 수많은 나라 가운데 인심이 어그러지고 잘못 빠져 그 떳떳한 본성을 잃어버린 것이 오늘날 붕당의 환난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고 탄식했다.
조선시대에는 실용주의도 약했다. 당쟁에 지친 이율곡은 동이 옳든 서가 옳든 민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정약용은 “재정이 남고 모자라는 것을 분변하지 못해도 좋은 벼슬 하는 데 해롭지 않고, 병무와 재판을 알지 못해도 좋은 벼슬 하는 데는 해롭지 않다”고 개탄했다.
조선시대는 우리 정치사에서 순수이념을 가장 깊이 경험한 때였다. 그만큼 의미도 있지만 정치가 너무 극단적이었고 실제와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세종 때의 정치만은 실로 세계 역사에서도 중도실용주의의 모범으로 널리 칭송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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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피로 얼룩진 조선 창업기의 비극을 따뜻한 마음으로 어루만져 치유했다. 건국기의 불안한 시국을 생각해 무섭게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하도 있었다. 그러나 세종이 국정을 담당한 후 정치적 문제로 죽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성품이 강직한 허조는 왕에게도 거침없이 반론을 제기했지만 죽을 때는 웃으며 죽었다. 그는 죽으면서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을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부끄러운 것이 없다.…성상(聖上)의 은총을 만나 간(諫)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유한이 없다”고 하였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다. 백성을 하늘의 자식(天民)이라고 생각했던 세종으로서도 그 문제는 어쩔 수 없었다. 허조의 건의로 제정된 부민고소금지법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고발할 수 없게 한 법이었다. 이른바 강상의 윤리였다.
그러자 세종은 “만약 원억을 호소하는 소장을 수리하지 않는다면 원억한 것을 풀 수 없어서 정치하는 도리에 방해될 것”이니 “자기의 원억을 호소하는 소장만을 수리해 바른 대로 판결해줄 뿐이고, 관리의 오판을 처벌하는 일은 없게 해 존비(尊卑)의 분수를 보전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철저한 부민고소금지법을 만들고자 했던 허조 역시 “거의 중용(中庸)을 얻을 수 있겠다”고 하여 세종의 절충안을 받아들였다.

놀라운 지식인이자 천재였던 세종은 취미로 학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제왕의 도리는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케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것(安養)”이며 “내가 박덕한 사람으로 임금이 되었으니 오직 백성을 기르고 어루만질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였다”고 했다. 그의 일생은 이 꿈을 성취하기 위한 헌신이었다.
한글을 창제하고 음악을 정돈하였으며 의학, 지리학, 천문학, 농학, 식물학, 기상학, 수학, 군사학 등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지식 정비, 기술 개발, 문화 창조가 이뤄졌다. 천문학을 통해 달력을 제작하고, 농업정보학으로서의 기상학을 발전시켰으며, 식물학을 통해 다양한 약초 및 처방을 집대성하고, 농산물 품종을 개량했다. 그리고 정리되고 생산된 지식은 인쇄 및 출판사업을 통해 다양한 서적으로 발행 보급했다. 세종은 “마을에서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끊어지도록 하여 살아가는 즐거움(生生之樂)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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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단순한 사회통합과 민생안정을 넘어 조선의 전통을 창조했다. 이 때문에 이율곡은 “세종이 우리나라 만년의 기틀을 세웠다”고 평가했다. 어떤 의미에서 세종은 조선다움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다움을 창조한 인물이었다. 한글이 한국인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만 생각해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지난 1백50여 년 동안의 우리 역사도 극단의 시대였다. 나라가 망하고 낯선 근대를 건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다툼이 많았고 피도 많이 흘렸다. 한말에 개화파, 위정척사파, 동학이 서로 다툰 것도 그렇고 일제강점기에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상쟁한 것도 그렇다. 광복 이후의 분란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발발해 동족 간에 많은 피를 흘렸다. 1960년대 이후에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서로 싸웠다.
이 시기에는 극단주의와 이념주의가 역사의 중심이었다. 중도실용주의가 숨 쉴 공간은 지극히 좁았다. 중도실용주의는 소위 ‘사쿠라’로 매도됐고 양 극단으로부터 공격받았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지금 중도실용주의는 한국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예전과 달리 체제의 기본 가치에 대한 합의가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문제가 많지만 모두 치유 가능한 것으로 믿는다. 이 때문에 지나치게 대립을 조장하는 것은 정략적인 것이다. 중도실용주의는 대립을 완화하고 건국, 산업화, 민주화 과정을 통해 한국사회에 이식된 것들을 깊이 뿌리내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축적된 힘이 남북통일의 저력이 될 것이다.
글·김영수(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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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