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대한민국 건국은 1948년 이루어졌지만, 그것을 준비하고 다지는 일은 1945년 해방부터 1954년 제네바 정치회의에 이르는 긴 기간에 이루어졌다. 그 시기에는 아슬아슬한 일이 많았다. 대한민국이 탄생하지 못할 위기도 있었고, 탄생했더라도 사라질 위기도 있었다. 그러한 위기의 하나가 5·10선거 결정 과정이었다.
해방 직후 북한지역에서는 공산정부가 세워지고 있었다. 해방된 지 한 달밖에 안 된 9월 20일에 스탈린이 내린 정부 수립 지시에 따라, 소련군은 사실상의 정부인 임시인민위원회를 내세워 ‘토지개혁’, ‘화폐개혁’, ‘군대창설’과 같은 국가 과업을 수행해 나갔다.
그러나 남한지역은 정부 수립도 못한 채 사회 혼란만 더해갔다. 미군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틀 안에서 소련과 합의하여 좌우합작의 남북통일정부를 세워보겠다는 허망한 꿈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미국은 한국 정부 수립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고, 유엔은 자유선거를 통해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48년 초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로 오게 되었다.
미군의 하지 중장은 선거 협조에 동의했지만, 소련군의 스티코프 대장은 위원단이 북한 땅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선거 협조를 거부했다. 그러므로 위원단은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만두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이승만과 김성수의 우파는 남한만의 선거를 지지했다. 일단 남한에서 정부를 세워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민생을 챙기게 한 다음, 그것을 토대로 북한과 통일정부 수립을 생각하려 했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남로당 중심의 좌파는 남한만의 선거에 반대했다. 그들의 목표는 남한을 혼란에 빠뜨리고 미군을 철수하게 만든 다음 북한의 남침을 통해 통일하는 것이었으므로, 어떻게든 정부를 세우지 못하게 하려 했다. 1948년에 들어서면서 북한은 이미 남침에 필요한 군사력을 확보한 상태였다.
문제는 대중적 영향력이 컸던 김규식, 김구 같은 제3그룹 지도자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이유는 달랐지만 남한만의 선거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좌파와 의견을 같이했다. 남한에 정부가 생길 경우 남·북 분단이 굳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통일정부 수립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과 남북협상을 서둘렀다.
분열되어 있기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도 마찬가지였다. 전체 분위기는 남한만의 선거에 대한 반대가 우세했다. 그러므로 이승만과 김성수의 우파 세력은 긴장 속에서 위원들을 상대로 피눈물 나는 설득작업을 벌이게 되었다. 위원단은 원래 9개국 대표로 이루어졌지만, 공산국인 우크라이나가 참석을 거부함으로써 8개국이 서울에 와 있었다.
가장 껄끄러운 인물은 위원장인 인도 대표 ‘메논’이었다. 그는 소련 대사를 오랫동안 지낸 친소적이고 친공적인 인물이었다. 인도라는 나라 자체도 중립국으로서 친소적인 대외정책과 사회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메논은 북한에도 애국자들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남한만 의논상대로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부위원장인 시리아의 ‘무길’도 껄끄러웠다. 당시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지하는 미국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그리고 영연방 국가들인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도 좌우합작 정부나 좌파 정부 밑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소련 편을 들 가능성이 컸다. 그러므로 미국과 남한의 우파를 지지할 나라는 필리핀, 중국, 엘살바도르의 3개국뿐이었다.
이에 이승만과 김성수는 미 군정청 경무부장인 조병옥과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으로 하여금 영어 잘하는 사람들을 모아 환영위원회를 구성하고, 환영대회, 환영만찬, 환영음악회를 열도록 했다.
의장인 메논에게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문학을 좋아하는 메논이 만찬모임에서 여류 시인 모윤숙을 만나게 되면서 문제는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가면서 메논의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부의장인 시리아의 무길의 태도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의장인 메논이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해야 할 것인가를 유엔에 묻기 위해 뉴욕에 갔을 때였다. 그는 선거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유엔 소총회는 그의 건의에 따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의했다.
그러나 그가 서울에 돌아왔을 때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유엔 소총회의 결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격렬한 토론이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 메논은 대표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마침내 1948년 3월 12일에 표결에 부쳐졌을 때, 찬성 4표, 반대 2표, 기권 2표로 선거실시안이 이겼다. 이승만과 김성수 진영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이처럼 찬성이 4표가 된 것은 메논의 인도가 찬성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는 예상대로 반대했지만, 시리아와 프랑스는 반대하지 않고 기권했다. 만일 인도와 시리아가 원래 예상했던 대로 반대에 가담했다면 반대가 5표가 되어 선거안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5·10선거가 실시되지 못해 대한민국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고, 남한은 혼란 속에서 표류하다가 북한의 남침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미군은 희망 없는 남한 땅을 떠나게 되어, 남한은 자연스럽게 공산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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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