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유통시장 새 역사 쓴 할인점
우리 유통환경이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변모하고 있다. ‘재래시장’, ‘백화점’ 등으로 대별되던 유통체계는 ‘재래시장’,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 등 다양한 채널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수퍼마켓보다는 크고 대형마트보다 작은 ‘수퍼수퍼마켓’, TV에서 제품을 파는 ‘홈쇼핑’,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주문하는 ‘인터넷 쇼핑’ 등 신업태까지 등장해 말 그대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방불케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유통시장은 건국 60년 동안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시장은 서울 ‘동대문 광장시장’이다. 당시 동대문시장의 개설은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한 물리적 행사였다고 한다. 김종한 등 4명이 토지, 현금 10만원을 출연해 발족한 동대문시장은 1905년 법원에 등기를 함으로써 이름을 확정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동대문시장과는 차이가 있다. 즉, 지금의 동대문시장은 1970년 12월 종로 6가 맞은편에 설립된 동대문종합시장과 청계천의 평화시장까지를 다 아우르기 때문이다.
남대문시장은 역사적으로는 동대문시장보다 훨씬 오래전에 생겼다. 조선 태종 14년, 서울 남대문 근처에 가게를 지어 상인들에게 빌려준 것이 시초였다. 당시 이름은 ‘남문안장’ 내지 ‘신창(新倉)’으로 불렸다.
1608년에 와 남대문시장은 포(布)·전(錢)의 출납을 담당하는 선혜청이 남창동에 설치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지방 특산물을 매매하는 창구로 쓰였다.
그 후 1921년 3월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며 근대적 의미의 시장 모습을 갖췄고 일제시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가 해방 후 남대문상인연합회에 의해 운영됐다. 한국전쟁 직후 남대문시장은 ‘아바이시장’으로 불렸다. 월남한 피난민들이 잿더미가 된 이곳에 몰려 천막을 치고 시장을 개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 1953년과 1968년 두 차례의 대형화재를 겪은 후 1970년 1월 최신시장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이 같은 유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재래시장에 대한 의존도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전국의 재래시장 수는 2005년 기준으로 총 1660개. 특히 점포 수 100개 미만의 영세시장이 1027개에 달한다. 매출도 하락세다. 2004년 35조4000억원에서 2005년에는 32조7000억원으로 떨어졌다. 이를 하루 점포당 매출로 환산하면 51만2000원과 47만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은 1930년 설립된 ‘미쯔코시 백화점’이다. 국내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지어진 ‘화신백화점’도 1931년에 개점했으니 국내에 백화점이 들어온 지도 70년이 훌쩍 넘었다. 이후 ‘미도파’의 전신인 ‘조지아백화점’이 1935년 설립됐다.
해방 후 백화점 설립은 더디게 진행됐다고 한다. 대한상공회의소 자료에 따르면 1950년대 백화점이 있던 지역은 서울, 순천, 춘천, 군산이 고작이었다. 서울에는 1954년 ‘미도파 백화점’과 ‘미쯔코시’를 개칭한 ‘동화백화점’이 들어섰고 ‘화신백화점’의 분신인 ‘신신백화점’이 개점함으로써 화신, 미도파, 동화, 천일, 자유, 신신 등 7개가 위치했다.
현대적 의미의 백화점은 1962년부터 1973년까지 집중적으로 생겨났다. 중소 규모이던 백화점은 대형 업체에 매각되며 몸집을 키웠다. 동화백화점이 1963년 삼성그룹에 인수되며 신세계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꿨고 1971년에는 현대백화점이 설립됐다. 또한 1973년에는 대농그룹이 미도파를 인수했고, 1979년에는 롯데쇼핑이 백화점 사업에 뛰어들며 유통왕국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 밖에 새로나백화점(1976년), 한양쇼핑(1979년)의 등장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SET_IMAGE]1,original,left[/SET_IMAGE]할인마트는 ‘가격파괴(價格破壞)’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할인점은 1993년 신세계가 설립한 이마트(E-mart) 창동 1호점이다. 이마트가 예상외의 성과를 올리자 홈플러스, 롯데가 잇따라 진출했고 1996년 유통시장 개방과 때를 같이해 지방까지 세를 넓혔다.
2000년대 들어서도 할인매장의 쾌속행진은 계속됐다. 대한상의에 따르면 할인매장은 2000년 163개에서 2004년 276개, 2006년 342개, 2007년 369개로 계속 증가했다. 매출도 2000년 10조5000억원에서 2004년 21조5000억원, 2006년 25조4000억원으로 올랐고 전체 소매시장에서의 비중도 16.6%까지 치솟았다.
유통업계에서 감히 상상도 못할 혁명을 친다면 바로 TV 홈쇼핑의 등장이다. 초창기 TV 홈쇼핑은 여러 면에서 미흡한 점이 많았지만 최근 들어 ‘홈쇼핑=대박’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면서 기업들이 탐내는 사업 1순위로 올라섰다.
국내에 TV 홈쇼핑이 등장한 것은 1995년. 한국홈쇼핑과 삼구쇼핑이 시초다. 특히 1998년부터 2002년까지 홈쇼핑시장은 연평균 72.3%의 경이적인 성장세를 기록하며 매출 3조원 시대를 맞았다. 홈쇼핑에 대한 접근성과 취급상품의 개선, 업체들의 마케팅 노하우 축적 등이 매출 신장의 이유이라고 관련업계는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스타급 쇼 호스트의 등장과 100% 환불제 등은 홈쇼핑만이 갖고 있는 특성을 제대로 살린 마케팅으로 평가된다.
TV 홈쇼핑 전체 매출은 인터넷 포함 17조2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수출산업으로 우뚝 선 자동차
현재 우리나라에서 잘나가는 산업을 꼽으라면 반도체, 자동차, 건설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자동차는 글로벌화의 효시 격이다.
해방 당시 국내 자동차산업은 수공업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1937년 ‘김용주’라는 사람이 ‘국산자동차(주)’를 세우고 ‘기아산업’의 전신인 ‘경성정공’이 1944년 설립됐지만 기술이나 사업 규모면에서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자동차 대수가 고작 7326대에 불과했다 하니 그때의 수준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던 자동차산업은 1955년 10월 국산 장려회 차원에서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가 출품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이 차가 당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 씨 형제들이 미군 지프차를 개조해 만든 ‘시발자동차’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되면서부터는 ‘새나라 자동차’가 소형 자동차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다. 새나라는 일본 닛산자동차와 제휴하고 조립공장을 건설하면서 곧바로 ‘닛산 블루버드’를 부분 조립 방식으로 생산해 냈다.
새나라는 1965년 11월 신진자동차로 이름을 바꿔 단다. 신진은 1963년 11월 새나라를 그대로 본뜬 ‘신성호’를 탄생시켰다. 신성호는 그러나 1964년 216대 등 모두 322대만 생산하는 초라한 실적에 그쳤다.
신진은 다시 1966년 1월 일본의 도요타자동차와 손을 잡고 1500cc급 ‘코로나’를 조립 생산했다. 생산 대수는 1969년까지 무려 4만여대. 하지만 32%에 불과했던 국산화율이 신진의 발목을 잡았다. 정부는 그 후 경고에도 불구하고 신진이 조립생산에만 전념하자 자동차산업의 다원화를 추진한다.
자동차산업이 다원화되자 업체들의 참여가 잇따랐다. 1970년 아세아자동차가 피아트로부터 CDK를 도입해 1200cc급 ‘피아트124’를 생산했고, 그 이전 현대자동차는 1968년 11월 1600cc급 ‘코티나’를 생산한다.
1973년 자동차산업은 또 다른 변화를 맞는다. ‘장기 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이 마련되면서 고유모델의 소형차 개발과 자동차산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된 것. 정부안에 따라 기아가 선택한 고유형 소형차는 ‘브리사’. 1974년 10월 탄생한 브리사는 1975년 국산화율 80%에 1만757대를 판매하며 ‘브리사 시대’를 열었다.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우리나라를 자동차 고유모델 국가로 올려놓은 제품은 현대자동차의 ‘포니’였다.
포니는 1976년 국내 승용차시장의 43%를 점하며 국내 시장을 석권했으며 1976년에는 국산 승용차 최초로 중남미에 수출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신데렐라로 등장한 통신산업
통신시장의 성장은 말 그대로 폭발적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띠리리’ 울리는 핸드폰 소리는 부의 상징이 아니라 이젠 누구나가 이용하는 소지품이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는 1896년 궁내부 주관으로 덕수궁에 설치된 전화다. 당시 전화기는 오늘날의 전화기가 아닌 수동 자석식 전화기였다고 한다. 이 전화는 전화기에 부착된 자석발전기를 돌려 교환원을 호출하고 교환원이 통화를 원하는 상대를 바꿔주는 식이었다.
1950년대에는 전화가 귀해 통화시간이 반강제되었다고 한다. 1954년 관보에 따르면 당시 체신부는 고시를 통해 공중전화 이용시간을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로 정하고 관리인이 월 2회 공중전화 휴무일을 정할 수 있게 했다.
그러는 동안 전화방식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옥외 무인 공중전화기가 1962년에 설치됐고 1969년에는 벽걸이형 자동식 공중전화가 등장했다.
1971년에는 우리나라 전화 역사에 큰 진전이 이루어졌다. 서울~부산 간 장거리 전화를 하면서 교환원 없이 직접 상대방과 연결을 할 수 있는 장거리자동전화 DDD(Direct Distance Dialing)가 보급됐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83년 공중전화기에도 DDD방식이 적용됐고 1986년에는 자기카드를 이용한 카드식 공중전화, 1990년대 후반에는 주화·카드 겸용 공중전화, IC카드 공중전화가 보급됐다. 또한 2000년대 초부터는 인터넷을 이용한 전화가 싼 값에 각 가정에 보급됐다.
휴대전화로 대표되는 이동통신도 지속적으로 발전해 오고 있다. 이들을 세대별로 구분하면 1세대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아날로그 방식의 이동통신이다. 이어 등장한 2세대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CDMA(부호분할다중접속)방식의 이동통신이다. 이는 아날로그와 다른 디지털 방식의 이동통신 서비스로 더욱 향상된 음성통화에다 문자 메시지, 무선인터넷 등 데이터 전송이 가능하다. 3세대 이동통신은 WCDMA 방식이다. 2GHz 대역의 주파수를 사용해 고용량 멀티미디어 서비스보다 확장된 국제로밍, 영상통화 등의 서비스가 가능하다.
이동통신 기술의 발전은 3.5세대란 돌연변이도 탄생시켰다. 3세대가 자리 잡기도 전에 등장한 3.5세대는 고속하향패킷(HSDPA, High Speed Downlink Packet Access)으로 불리는데, 3세대의 다운로드 속도인 2Mbps보다 훨씬 향상된 14.4Mbps까지도 구현할 수 있다.
<취재 및 자료협조: 건국60년기념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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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