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6·25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 10년… 3,367구 ‘가족 품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 하지만 전 국토를 초토화한 3년여 동안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한반도는 여전히 두 동강 나고 수많은 가족이 뿔뿔이 헤어져야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무엇보다 인명피해가 컸다. 6·25전쟁 당시 사망한 국군은 13만7천8백99명, 부상자는 45만7백42명, 실종자는 2만4천4백95명에 이른다. 유엔군 중에서도 4만6백70명이 목숨을 잃고, 10만4천2백80명이 부상했다.
민간인의 인명피해는 더 심했다. 24만4천6백63명이 죽고, 12만8천9백36명이 학살됐으며, 22만9천6백25명이 다쳤다. 게다가 북으로 납치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이 38만여 명, 피난민이 3백20만여 명에 달했다. 그로 말미암아 30만여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여 명의 고아가 생겨났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전쟁 중에 목숨을 잃거나 실종된 호국용사 중 아직도 13만여 명의 유해가 수습되지 못한 것이다. 전쟁 직후 수습해 국립현충원에 안장한 유해는 2만9천2백2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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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은 이처럼 6·25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으나 미처 수습하지 못한 채 아직도 이름 모를 산야에 홀로 남겨진 호국용사들의 유해를 찾아 국립현충원에 모시는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2000년부터 추진해왔다.
당시 이 사업은 6·25전쟁 50주년 기념 호국보훈사업의 일환으로 한시적으로 시작됐는데, 실제로 많은 유해가 발굴되고 해를 거듭할수록 국민적 호응이 커지자 체계적이고 영구적인 사업으로 추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국방부는 2007년 1월 전사자 유해 발굴 전문부대인 유해발굴감식단을 창설하고 사업주체를 육군에서 정부로 전환했다. 이듬해인 2008년 3월에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영구사업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제도적 근거를 마련했다. 또 지난해 3월에는 총리훈령이 제정돼 9개 정부부처 관계기관이 참여하는 범정부 차원의 지원협력체도 출범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 사업을 더욱 활성화하기 위해 유가족 유전자 샘플 채취기관을 전국 보건소로 범위를 넓혔다. 그 결과 지난해 유해 발굴 실적은 1천1백13구로, 사업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한 해 1천 구를 넘어섰다. 이는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발굴한 3천3백67구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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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는 유전자 샘플 채취에 참여하는 유가족에게 무료 건강검진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전사자 유해발굴사업도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연간 10만여 명의 인력을 투입해 전국 55개 지역에서 오는 11월 말까지 대대적으로 실시한다.
지난 3월 2일부터 시작한 올해 유해발굴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6월 7일 현재 전국에서 총 7백27구의 유해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사업을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올해 목표인 1천5백 구의 절반 가까운 유해를 발굴한 것이다.
유해발굴감식단의 유영승 공보장교는 “전사자의 유해를 찾지 못한 유가족은 지금이라도 전국의 가까운 보건소를 방문해 유전자 샘플을 등록하고, 전사자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유해 소재 제보에 적극 동참해달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글·김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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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