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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제2연평해전 유가족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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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박동혁 병장은 고교 시절부터 남몰래 시를 쓰던 마냥 밝고 책임감이 강한 청년이었다. 2000년 원광보건대 치기공과에 입학해 자신의 치기공소를 차리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대학 때는 식당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아버지에게 건강보조식품을 선물하기도 했던 효자였다. 2001년 2월 해군병 4백56기로 입대했다.

“9시간 동안의 대수술이었습니다. 왼쪽 다리의 대동맥이 끊겼습니다.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복부 등에 포탄 파편 1백여 개가 박혔습니다. 소장 7군데를 꿰맸고 대장은 모두 망가졌습니다. 척추에도 파편이 박혀 있고, 출혈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2002년 6월 30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무장교가 박동혁 병장의 수술 경과를 설명하는 동안 어머니 이경진(54) 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아들의 몸에서는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팽팽하게 부어오른 배와 다리, 시커멓게 그을린 몸. 이 씨는 붕대로 칭칭 감긴 이 청년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죽어도 좋으니 차라리 내 대장을 동혁이에게 이식해줄 수 없을까요?”라며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의사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 병장은 제2연평해전 당시 해군 제2함대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이었다. 북한 경비정의 기습공격을 받고 적탄이 쏟아지는 함정 위에서 부상한 전우들을 돌보다가 그도 끝내 총탄과 포탄 파편 세례를 받았다.

박 병장은 입원 사흘째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왔다가 다음 날 갑자기 심장박동이 멈췄으나 심폐소생술로 간신히 되살아났다. 의료진은 “의식을 찾으면 고통과 부상의 충격으로 쇼크사할 수 있다”며 “수면제를 투여해 박 병장을 재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입원 열흘 만에 의료진은 피가 통하지 않아 썩고 있는 박 병장의 왼쪽 허벅지를 절단했다. 뱃속의 포탄 파편엔 손도 대지 못했다. 그래도 이 씨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들이 퇴원하면 요양시키려고, 국민이 모아준 성금으로 강원도의 한 산골에 집터도 마련했다. 입원 한 달이 지나 박 병장이 깨어났다. 박 병장이 왼손으로 다리 쪽을 더듬었다.

“엄마, 잠에서 깨어났더니 다리가 없어져버렸어….”

마침내 박 병장에게 패혈증이 발생했다. 9월 20일 오전 4시, 병원 앞 숙소에 있던 부부에게 박 병장의 병세가 위급하니 급히 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 애를 더는 힘들게 하지 마세요.”

박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54) 씨가 심폐소생술을 하려는 의사의 손을 밀어냈다. 아들을 떠나보내기로 한 것이다. “동혁아! 동혁아!” 이 씨의 통곡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버지 박 씨가 깡마른 아들의 코에 한참이나 입을 맞췄다. 부부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84일 동안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지어 먹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

최근 강원 홍천군 동면의 자택에서 만난 부부는 나이보다 늙어 보였다.

“우리 부부가 강원도와 무슨 인연이 있겠습니까? 동혁이가 퇴원하면 요양시키려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산 땅이 여기예요. 컨테이너박스를 1백40만원 주고 사서 들여놓고 7년을 살다가 지난해 11월에 융자를 받아 집을 지었어요.”

부부는 새로 지은 집에 박 병장의 방을 마련해 놓았다. 탁자에 해군기를 깔고 아들의 백일사진, 고등학교 졸업사진, 참수리 고속정 사진 등을 올려놓았다. 아들을 잃은 부부는 전국을 헤맸다.

“한 1년을, 혹시 추억거리라도 있을까 하고 아들과 갔던 곳을 돌아다녔죠. 가면 뭐가 있겠습니까? 허망하더라고요.”

이 씨에게는 우울증과 불면증이 찾아왔다. 2004년 8월 박 씨가 암소 두 마리, 송아지 두 마리를 사왔다. 부부가 사는 컨테이너 위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한쪽에 축사를 만들었다. 지금은 일곱 마리를 키운다.

“소가 우리를 살렸죠. 살아 있는 생명을 돌보는 것이 좋았어요. 날마다 똥 치우고, 씻기고, 털 빗기고. 처음에는 아들 묘가 있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일주일에 한 번씩 갔지만 요새는 석 달에 한 번만 가요. 소 밥 줘야 하니까.”

이들 부부는 아들의 ‘명예회복’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은 당시 ‘공무상 사망’으로 처리됐다.

“우리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나요?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 전사한 내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해주면 더는 바랄 게 없습니다.”


 


 

“저 시은이예요. 어버이날 축하해요. 제가 모은 돈으로 학교에서 카네이션을 샀어요. 아빠에게는 못 드려서 죄송해요. 제가 마음속으로 전할게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제2연평해전 때 참수리 357호정에서 함포를 관리하는 병기사로 근무하다 숨진 조천형 중사의 부인 강정순(36) 씨는 올해 어버이날 초등학교 2학년인 딸 시은(8)이한테서 특별한 카드를 받았다. 곱게 접힌 카드에는 시은이가 또박또박 쓴 짧은 편지글과 함께 긴 머리의 엄마와 군복을 입은 아빠가 크레파스로 그려져 있었다.

결혼 반년을 겨우 넘긴 때였다. 울어대는 아기를 안고 정신없이 남편의 3일장을 치르고 나니 모유마저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분유를 먹였다. 자꾸 분유를 토해내다 장염에 걸린 아기를 들쳐 업고 늦은 밤 병원으로 뛰어가며 강 씨는 곁에 남편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가장을 잃은 강 씨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백방으로 일자리를 알아봤다. 첫 직장은 대전의 한 백화점. 그전까지 살림만 하던 강 씨는 아이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판매원으로 일했다.





 

허리디스크가 생겨 1년여 만에 백화점을 그만두고는 대전 국가보훈처 직원의 조언으로 자격증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아기를 돌보면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정보처리기능사 공부에 몰두했다. 결국 보훈처의 추천으로 2004년 정부대전청사에 계약직으로 취직했고 이듬해인 2005년엔 대전 서구 기능직 10급 공무원으로 채용됐다.

직장을 얻은 뒤에도 쉬지 않았다. 2006년부터 퇴근 후 시간을 이용해 대덕대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2년 뒤에는 한밭대 경영학과에 편입했다. 오후 6시에 퇴근을 하면 학교에 가 수업을 듣고, 집에 들어오면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지만 집에서도 시은이 공부를 봐주며 과제를 위해 책을 폈다. 올해 2월 그는 경영학과 학사학위를 받았다. 강 씨는 조만간 또 공부를 시작할 계획이다. 사회복지학 공부를 다시 해 복지사로 어려운 이들을 돌보고 싶다는 포부다.
 

강 씨가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기는 점은 딸 시은이의 가슴속에 아빠가 굳건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우리 아빠는 왜 와서 달리기 같이 안 하느냐”며 운동회 때마다 엄마를 가슴 아프게 했다. 하지만 이제 주변에서 “아버지는 뭐 하시니”라고 물으면 “우리 아빠는 해군이셨는데 전사하셨어요”라고 당당하게 답한다.

“한번은 시은이가 손을 잡고 경비실로 가더니 경비 아저씨를 소개해주더라고요. 경비 아저씨도 해군이라고….”

시은이의 학교 친구들도 시은이 아빠가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해군이라는 사실을 모두 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시은이가 친구들에게 설명을 해줬기 때문이다.

강 씨는 시은이를 위해서라도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시은이가 아빠를 외면당한 해군이 아니라 용감하게 싸우다 간 ‘전사자’로 기억할 수 있어야 해요.”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벼락같은’ 소식을 들었던 2002년 6월 29일 그날도, 이틀 뒤 치러진 아들의 영결식에서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통곡할 만한 일은 많았다. 아들과 함께 전사한 고(故) 한상국 중사의 시신은 사고 발생 41일 만에 배와 함께 찾았다.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고 그는 한 단어씩 끊어서 말했다.

8년이 지났고 아버지는 달라졌다. “사고 처리 후부터 뜻하지 않은 순간에 눈물이 나온다”고 말했다. 절에서 아들을 추모하다, 집에서 아들의 기사를 읽다,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그는 꼿꼿한 자세와 고집스런 눈매 그대로 죽은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울었다. 2002년 제2차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고 윤영하 소령 아버지 윤두호 씨(68) 이야기다.

윤영하 소령이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해 군인의 길을 걸었던 데는 아버지 윤 씨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군인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다. 설령 전사하더라도 나라가 너와 너의 가족들을 보살펴줄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1999년 제1차 연평해전에서 우리 군이 대승을 했으니 분명 어떤 식으로든 북한군의 보복이 있을 것이란 생각은 했어요. 그리고 두 번째는, 아마 북한군이 기습을 해올 테니 우리 해군의 피해가 클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당시의 상황을 말했다. 우리 군의 ‘피해’에 아들의 죽음도 포함된 심정은 어땠을까. 윤 씨는 ‘명예’를 말했다. 억울함도, 슬픔도 아닌 명예였다. 그는 “군인은 언제든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라며 “전사 이상으로 군인에게 명예로운 일은 없다”고 말했다. 아들은 죽었지만 그 죽음이 명예로운 것이었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윤 씨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과 정부의 태도가 안타까웠다. 윤 씨의 처지에서는 더 이상 ‘국가의 태도’가 아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2연평해전이 벌어진 2002년 6월 29일 바로 다음 날 일본으로 출국했다. 월드컵 공동 개최국 정상 자격으로 일본에서 열리는 결승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지만 윤 씨는 국군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의 출국에 문제가 있다며 한 가지 소원을 말했다. 언제가 되든 제2연평해전 사망자들의 공식 추모식에 대통령이 한 번이라도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것. 2002년 영결식엔 대통령,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모두 오지 않았다. 정치인들도 거의 오지 않았다. 참석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 손학규 전 경기지사, 장정길 해군참모총장 등이었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마지막까지 책임진다는 의사를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이 죽은 영결식에는 국가를 대표하는 어느 누구도 오지 않았습니다.”
 

글·조종엽 장윤정 박재명(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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